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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요한의 우물 (121)
깊이에의 강요

우리는 모두 '라자로'입니다. 라자로를 벗으로 삼으시고 사랑했던 예수님(3절.5절.11절.36절)께서는 우리도 친구라 부르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자’라는 뜻의 이름의 라자로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지요. 라자로를 살리듯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살리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들으시고도 왜 한걸음에 달려가 치유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비록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혔다고 하더라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서 서둘러 가시지 않고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을까요? 이번 주는 지난 주 태생소경 복음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유다인들은 넷째 날이 되면 영혼은 멀리 떠나가고 본격적으로 ..

지난주에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여인의 변화를 들었다면, 이번 주는 처음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태생 소경을 가리킬 때 ‘남자’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아네르άνήρ를 쓰지 않고 ‘인간’이나 ‘인류’를 가리키는 안트로포스άνθρωπος를 씀으로써(창세기의 ‘아담’처럼)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눈이 먼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미 로고스 찬가에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목적이 영적으로 눈먼 인간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려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1,18) 하느님을 본 적 없는(=태생 소경) 인간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시는 분 ..

Painting by Helen Cherkasova. 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이번 주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 복음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5)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말입니다. 이 여인은 안좋은 소문에 휘말려 있어서 사람이 없는 시간인 정오 무렵,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없으니 수군거림은 피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다니지 않는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홀로 물동이를 짊어지고 걸어야 했을 것이고, 무거운 우물 뚜껑을 열어주거나 물동이를 이는 것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32-34절) 이번 주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두 번(31절. 33절)이나 말합니다. 그런 요한이 복음의 끝에서는 ‘과연 나는 보았다’(34절)고 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요한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보고 싶고 알고 싶은 마음으로 복음을 묵상하다 떠오른 것은 말없이 물속에서 머리를 숙였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내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요한 1,46)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굳이 드러내진 않아도 속으로는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무슨 좋은 것이 있겠나. 희망하는 것도 지친다. 기대를 접고 살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바랐던 내가 바보지… 그러면서 서둘러 피하고 포기하고, 마음을 접은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실패를 희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혼잣말에도 늘 응답이 있었다. 드러내지 못한 내 볼멘소리에도 늘 응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요한 1,39)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와서 보시오.” (요한 1,46) 타인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했다. 여기에 혼자 멈춰 있으면 볼 수도, 알 수..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34) 세례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33절), 이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알아보고 증언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받아들이는 예수의 자세를 보고. 오늘은 '과연 나는 보았다'라는 문장을 곱씹었다. 요한은 무엇을 보았기에 알아보고, 증언할 수 있었을까. 나도 복음 속에서 요한이 본 '그것'을 보고, 알아듣고 싶었다. 그러다 말없이 물 속에서 머리를 숙였을 예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자꾸만 올라와 답답해하고, 숙이고 싶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개를 젓던 나를 위해서였을까. 그래,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성령이 내려와 머무르시는 ..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요한 5,35) 등불은 '타오르며' 빛을 낸다. 빛을 내려면 타올라야 하고, 타오르려면 불길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 등불이 되는 일은 결국 남김 없이 나를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다. 뜨거운 불을 견디고 타들어가고 녹아 내려, 재가 되어 흩어지는 것까지를 다 겪는 일이다. 혼자서 빛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일이기에. 오늘은 요한의 삶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겠다. 빛나려는 마음보다 빛을 내는 마음으로, 빛나려는 마음보다 타오르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