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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요한 9,1-41 암흑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오면... (가해 사순 제4주일 레지오 훈화) 본문

요한의 우물/요한 9장

요한 9,1-41 암흑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오면... (가해 사순 제4주일 레지오 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23. 3. 16. 23:00
The Healing of the Blind-Born Man by Julia Stankova

  지난주에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여인의 변화를 들었다면, 이번 주는 처음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태생 소경을 가리킬 때 ‘남자’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아네르άνήρ를 쓰지 않고 ‘인간’이나 ‘인류’를 가리키는 안트로포스άνθρωπος를 씀으로써(창세기의 ‘아담’처럼)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눈이 먼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미 로고스 찬가에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목적이 영적으로 눈먼 인간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려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1,18) 하느님을 본 적 없는(=태생 소경) 인간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시는 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영적 소경입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을 볼 수 없기에 그분을 찾아 나설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살다보면 만신창이가 되어 도저히 예수님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옵니다. 도움을 청할 수도 받을 수도 없을 정도로, 기도조차 할 수 없다 싶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수 없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지난 주 모든 사람을 피했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피할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이 자명하고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곧잘 잊어버립니다. 이번 주에도 예수님은 눈먼 이를 보고 먼저 다가가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겠지요. 버려진 상태에 있는 영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영혼, 끝도 없이 헤매는 영혼에게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미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길가의 태생 소경에게도, 우리들에게도... 진정한 기쁜 소식! 마치 창조 때처럼 진흙을 개어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 실로암 못으로 가서 씻으라고 하셨고, 태생 소경은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에 의해 ‘파견된 이’란 뜻인 실로암 못에서 눈을 뜨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로 가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자리에서 고쳐주지 않으셨을까요? 실로암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550여미터 내려가야 합니다. 내려가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눈 위에 진흙을 덧발랐으니 온전한 암흑 같았을 것이고, 빛이 느껴지지 않는 차갑고 짙은 어둠 속에서 분명 여러 번 넘어졌을 테고, 사람들이 진흙을 바른 얼굴을 보고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굳이 힘든 걸음을 걷게 하신 이유는 뭘까요? 그가 믿음으로 응답해야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살다보면 간절했던 기도의 응답은 더디고, 더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고, 내 잘못도 아닌데 자꾸만 넘어지고, 심지어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놀리기까지 합니다. 그런 시간에 왜 나를 곧장 낫게 하지 않느냐, 왜 나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느냐,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나를 넘어뜨리느냐, 억울한 나를 왜 조롱하느냐...를 좀 더 뒤로 미루고 어둠 속에서 비탈길을 걸으며 조롱에도 두려움에도 묵묵히, 넘어져도 또 일어나 나아가는 것이 응답일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요한복음서의 치유 기적은 언제나 인간 편에서 믿음으로 응답할 때 일어납니다. 그러니 암흑 같은 시간이 우리에게 오면,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때라는 걸 알아차리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은 태생 소경에게 연민을 느끼기보다 누구의 죄 때문에 그가 소경으로 태어났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생각과 다른 일이 생기거나 원하지 않는 일 앞에서  탓할 존재를 먼저 찾는 습관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믿음으로 걸어가는 사순 제4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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