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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요한의 우물 (124)
깊이에의 강요

믿지 못하는 제자 토마스에게 한 번 더 나타나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예수님."결코 믿지 못하겠소."라는 말이 무색하게모두가 보는 앞에 나타나셔서 말씀하신다."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그분은우리가 믿기를 주저하고 두려워할 때,식어버린 마음으로 믿음을 거부할 때기꺼이 우리에게 '한 번 더' 나타나신다. '한 번 더' 해보는 사랑.이 사랑을 체험한 토마스에게예수님은 다른 누구의 하느님이 아닌"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 되신다. 그러니 할 만큼 했다 싶을 때, 앞이 캄캄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나도 '한 번 더' 해봐야겠지. 오늘은 예수님이 토마스를 부르신 날이 아니라 토마스가 예수님을 부른 날이다. 그러니 ..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13절) 직접 보고 만질 수는 없지만,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체험함으로써 믿어 고백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보이는 것, 만져지는 것, 그래서 눈으로 확인하고 입으로 맛을 볼 수 있는 것만 믿을 수 있다는 이 세상의 논리는 모든 영적, 신앙적인 요소들을 거부하는 편협한 사조를 만들어 냅니다. 신앙을 갖고 성당에 다니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논리는 내가 받아들인 것만 소중하다는 나 주인적인 사고를 형성시키고, 나 아닌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합니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 우리에게 오신 이 낯선 성령은, 우리가 편협함에 갇혀 하느님까지 거부하는 죄의 속성을 바로잡아 주실 ..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 #dailyreading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꽃이 피는 것이 아니듯, 구원도 알아듣고 바라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내가 만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내게로 오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그분께 있으며,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칠 수가 없다. 내가 만나는 모든 환자가 큰 아픔을 겪거나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거나 기도를 간절히 원하지는 않는다.어떤 환자들은 시간이 지나면 곧 나을 것이기에 나의 기도를 기꺼이 반기지는 않을 수도 있고,잠시이긴 해도 노는 시간을 굳이 멈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때론 모든 것이 간절한 환자와 (내 눈에) 나일롱 환자와의 간격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제자가 예수님께 더 다가가, “주님, 그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유다가 그 빵을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 (요한 13,25-27) 오늘은 유다가 하려는 일(27절)이 무엇인지 아셨으면서도 포도주에 빵을 적셔서 건네주셨던 예수님을 묵상한다.적어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지 말라'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신다. 다 아시면서도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다른 제자들에게 유다가 '그'임을 알리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그'는 바로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까지 당신의 일을 하신다.그리고 우리는 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요한 5,8-9) 건강해지고 싶냐는 질문에 자신을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답한 병자에게 하신,자신을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라는 말씀. 이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저 말씀이부드럽지만 나무라는 말씀처럼,공감과 위로보다는 건조한 가르침처럼 여겨지곤 했었다.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이 말씀이 확신을 주는 표.지.판. 같았다. 산속에서 길을 잃어 헤매고 있는데 마침내 방향과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만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여기까지 잘 찾아왔다는 위로도 주고, 이제부터 가는 이 길을 옳은 길이라는 안도감을 주고,비록 혼자 가야 하지만 의심과 불안 없이 갈 수 있다..

흥미롭게 읽은 책 중에 ‘기생(寄生)’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기생하다’는 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생물이 함께 생활하며, 한쪽이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이 해를 입다.’는 뜻이지요. 기생이나 기생충에 대한 아주 편협한 지식만 가지고 있던 제게 이 책은 어마어마한 세상을 열어 보여 주었습니다. 기생충은 숙주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데, 숙주에게 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지만 어떤 경우, 기생충과 숙주는 진화를 거듭해가면서 서로의 공생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생하는 생물 중 따개비는 게의 다리 부분에 붙어서 몸속으로 침투하여 그 안에서 살아가며 숙주인 게의 성별까지 바꿔가면서 몸 안에 알을 낳고 살아갑니다. 따개비가 일단 몸에 들어와 기생하기 시작한 게는 그때부터 서서히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가..

성경에는 군중이 많이 나오지만 진짜 예수님을 만난 건 개별적인 '자기 자신'일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간 '손이 오그라든 사람 한 사람', 집으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많았을 때 지붕을 뚫고 내려진 '중풍병자 한 사람', 수많은 사람이 밀쳐댔지만 정확히 옷자락을 붙잡았고 군중 틈에서 용기를 내어 예수님 앞에 나선 '하혈하는 여인 한 사람'이 치유를 받습니다. 예수님 가까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아가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이번 주에 나오는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여도, 물 위를 걸어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다가가 안심을 시켜도 믿음의 담보로 기어이 표징을 요구했고, 생명을 준다고 하니 덜컥 탐이 ..

이번 주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사화인데. 특별히 제자들의 '동문서답'을 살펴볼까 합니다.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필립보는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여기 보리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합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은 제자는 없습니다. 그저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생각하고, 가진 것의 빈약함에 절망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물으시는 말을 듣기는 해도 내 생각으로 꽉 차 있어서 동문서답을 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는 구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