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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사순절 동안 성당에 앉아 내내 텅 빈 예수를 응시했었다. 빛이 관통하도록 자신을 온전히 비워 십자가와 하나가 된 예수.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창을 통해 빛이 들어오고 성당을 가득 채우는 걸 볼 수 있다. 그 빛은 예수를 그대로 통과하고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도 한다. 이런 날은 예수의 형체가 십자가임이, 십자가여야 함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떤 날은 빛이 서서히 잦아들고 고요한 어둠이 성당을 채웠다. 그런 날은 십자가와 예수는 어둠 속에서 구별되지 않는, 구별할 필요조차 없는 하나였다. 빛이 나를 관통하도록 온전히 자신을 비워, 빛이 나를 채울 때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는 것. 십자가가 온전히 나의 배경이요, 형체가 되는 것. 부활절 끝기도마저 마친 시간, 혼자가 되어서야..
첫눈이 오길래 얼른 언니 수녀님한테 영상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흔쾌이 찍어 보내준 영상들을 하나로 묶어 음악을 깔았다. 1:30내로 해야해서 음악도 짤리고 영상도 다 넣진 못했지만 겨울이 가기 전까지 틈틈이 봐야겠다. 눈이 오면 괜히 본원이 그립다.
여름이 가까우니 끝기도까지 마쳤는데도 아직 세상이 환하다. 어둠이 내리고 밤이 가까울수록 수도자는 혼자로 되돌아간다. 홀로임을 온 감각으로 깨달으며 그분께로만 가야하는 시공간 속으로.
곧 어두워질테고 조금 피곤하기도 해서 중정을 몇 바퀴 돌았다. 이십 년 넘도록 지켜본 중정의 식물들. 중정 안에서만 보이는 하늘. 오늘따라 남천이 너무 예뻐서 그만 하나 슬쩍 데려와 내 방 앞 커튼에 붙였다. 안에 불을 켜 두고 어두운 복도에 서니 너무 예쁘더라. 내 안에 불을 밝히면, 그래, 더 아름다워지지.
매리 다니엘 수녀님의 장례 미사. 성체를 모신 후 수련소 때부터 전통처럼 늘 부르던 시편23편을 불러드렸다. 한 수녀님이 녹음을 해주셨고, 소리가 좀 작긴 하지만 한 번만 듣기는 아까워 찍어둔 사진들로 동영상을 만들어 두자 싶었다.
발등이 부러진 채로 본원으로 이사를 했고, 준양호동에 머물면서 출퇴근을 했었다. 아프고 불편하고 혼자 괜히 서러웠던 순간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나를 주저앉히는 감정들 못지 않게 나를 사로잡던 감사, 위로, 응원... 언제 그랬냐 싶게 나는 두 발로 잘 걷고 있고 출퇴근하느라 하루가 빠듯하고 되찾아가는 일상의 고단함으로 지친 표정이 되기 일쑤지만, 더 늦지 않게 새겨두고 싶은 기억들. 그날그날 짧게 적어 둔 메모들을 모았다. 오래오래 간직한 채로 살아가야 해, 갚아가며 나눠가며... - 동기 수녀는 출근이나 퇴근 길에 들러 간식을 주고 가고, 함께 살았던 언니 수녀님은 내가 밥을 다 먹으면 부리나케 와서 그릇을 챙겨간다. 할머니 수녀님은 물을 떠다 주시고 도서관 수녀님은 내 이름으로 대출 기록을 적으시고 ..
우선 성령께서 내려와 주시길 청하고, 다음으로 기도의 분위기를 가다듬는다. 그리고 성경 안에 계신다고 믿음으로 내가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고자,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는 자세를 갖춘다. 그런 다음 본격적으로 '읽기' 과정에 들어가는데, 무엇보다 먼저 본문을 객관적이고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연속 독서의 원칙을 지켜서, 읽고 싶은 방식대로 읽는다든지 즉흥적인 선택을 한다든지 해서 본문에 일종의 폭력을 가하지 않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이 주관주의를 물리치고 "기록된 것"의 타자성을 존중하며 있는 그대로의 본문에 접근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그리하여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 본문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갖추고, 마침내는 그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알아채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