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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내가 살면서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 본문

이 여자가 사는 곳

내가 살면서 기억해야 하는 이야기

하나 뿐인 마음 2021. 4. 27. 22:01


발등이 부러진 채로 본원으로 이사를 했고, 준양호동에 머물면서 출퇴근을 했었다. 아프고 불편하고 혼자 괜히 서러웠던 순간들이 많았었다. 하지만 나를 주저앉히는 감정들 못지 않게 나를 사로잡던 감사, 위로, 응원... 언제 그랬냐 싶게 나는 두 발로 잘 걷고 있고 출퇴근하느라 하루가 빠듯하고 되찾아가는 일상의 고단함으로 지친 표정이 되기 일쑤지만, 더 늦지 않게 새겨두고 싶은 기억들. 그날그날 짧게 적어 둔 메모들을 모았다. 오래오래 간직한 채로 살아가야 해, 갚아가며 나눠가며...

- 동기 수녀는 출근이나 퇴근 길에 들러 간식을 주고 가고, 함께 살았던 언니 수녀님은 내가 밥을 다 먹으면 부리나케 와서 그릇을 챙겨간다. 할머니 수녀님은 물을 떠다 주시고 도서관 수녀님은 내 이름으로 대출 기록을 적으시고 책도 골라서 갖다 주신다. 아, 근데 좀 지루한 책이군요 ㅎㅎㅎ

- 퇴근하고 들어오는데 후배 수녀님이 목발 짚고 걷는 게 안타까웠는지 “뭘 도와줄까요?”하고 물었다. 휠체어라면 좀 밀어줄 수도 있겠지만 목발은... “고맙지만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하니 “그럼 안아줄까?”하더라.

- 유기서원자 때 함께 살았던 할머니 수녀님은 식사가 끝나면 휠체어를 잡고 나를 기다리신다. 방안까지 데려다 주시면서 뒤에서 속삭이시길, “내 방은 000번이야. 필요할 때 언제든 전화해. 내가 마음으로부터 도와주고 싶어.” 이런 마음은 어디에서 나올까.

- 검은 수도복 공동 빨래날.
전날 아침부터 동기가 찾아와 내일 휴가를 가야하니 빨래할 수도복 지금 내놓으라고.
퇴근해서 샤워실 들어갔는데 불 켜진 것 보고 달려온 언니수녀님. 어서 검은 수도복을 내어놓아라.
침대에 눕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동생수녀님 왈 “빨래할 거 찾으러 언제 갈까요?”

- 마음으로부터 도와주고 싶으시다던 우리 할머니 수녀님은 오전에 퇴근해서 돌아오는 날 보시고는 “복도 청소 하는 김에 수녀님 방 한 번 돌게!”하신다. 복도에 햇빛이 가득하다.

- 의자로 옮겨 앉는 것이 불편해서 벽쪽이었던 책상을 90도 돌려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휠체어 상태로 앉을 수 있게 했다. 형광등을 등지지 않고 여러모로 편하다. 다만 휠체어를 밀어주시는 수녀님들이 하나 같이 하시는 말씀이, “말씀 앞으로 나아가라!” 그때마다 뭔가 의미심장해.

- 방금 할머니 수녀님 들어오셔서, “방해되지 않게 수녀님 출근하고 없을 때 들어와서 청소를 해도 되냐?”하셨다. ㅠㅠ 감사하고요, 아무데나 들어오시라 하니 “그걸 허락 받아야 해서 왔어.” 하신다. 함께 살 때도 성탄 부활 등 성당이 바빠서 내가 정신 없을 때 말없이 내 청소자리를 대신해 주셨던 분

- 아이고 내가 웃겨서... 할머니 8일간이나 휴가 다녀오셨는데(나랑 강원도 갔었던 게 올해 유일한 휴가섰다고) 친척 집에서 이걸 보고는 내 생각이 나서 ‘집어’ 오셨다고 ㅋㅋㅋㅋㅋ 시계라서 엄청 묵직함


- 퇴근해서 들어오니 방이 환하다. 둘러보니 쓰레기통까지 비워져 있다. 할머니 수녀님 다녀가셨구나... 각자의 스타일대로 나를 응원해 주시는 분들. 신자들한테도 갚을 은혜가 많은데 요샌 수녀님들한테도 쌓인다, 사랑의 빚.

- 나는 아침기도를 드러러 2층 성당으로 가기 때문에 수녀님들과 방향이 반대다. 마주치면 늘 휠체어를 밀어 데려다 주고 돌아서 가시는 수녀님. 서너번 마주치고 나니 너무 죄송해서 어제부터 10분 일찍 일어났는데 오늘 또! 혼자 갈 수 있단 내 말에 “갈 수 있는 거 나도 안다. 근데 힘드니까 그렇지.”

- 휴게하러 가는데 굳이 엘리베이터 앞까지 밀어주신 수녀님. 혼자 갈 수 있으니 휴게 들어가시라 하니, “죽을 준비하는 노수도자가 지금 이 순간 이거 하나 못밀어주면 천국을 지금 못살아.” 어르신들이 더 많이 밀어주셔서 죄송하다 했더니 “아파 본 사람들이라 그래. 아플 때 이것도 얼마나 힘든데...”

- 어디건 아픈 이들이 있기 마련이고 몸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 아프다. 아픈 시간이 길어 스스로 조금 떨어져 지내는 분이 있는데 소소하게 챙겨주려 하고 이것이 필요한지 ‘묻는다’. 처음엔 고마운 마음이 앞섰는데 이제야 겨우, 이분이 마음 속으로 원하는 게 이런걸까, 했다. 나도 그렇게 다가가야지.

- 저녁미사 후 퇴근하면 수도원은 이미 대침묵 시간이라 현관을 밖에서 열 수가 없다. 어젠 비까지 와서 파킹하고 뒷문까지 목발로 가니 숨도 차고 힘들어 건물 안에 들어서자마자 라디에이터에 앉아 쉬었다. 기도를 마치고 자러 가던 동생 수녀님이 날 봤는데 말없이 방까지 가서 휠체어를 밀고 왔더라.

- 오전에 세탁실에 갔다가 할머니 수녀님을 만났다. 빨래를 돌려놓고 나오는데 몇분 남았냐 물으시더니 끝나갈 무렵 방에 찾아오셨다. 결국 함께 가서 빨래 꺼내주셨는데 퇴근해서 돌아와보니 다림질까지 해서 방에 걸어두셨네. 어떻게 갚지요ㅠ 마음으로 도와주고 싶으시다더니, 성심성의껏 도와주셔ㅠ

- 내가 머무는 곳은 할머니 수녀님들 계신 준양호동. 방이 좀 좁지만 샤워실이 딸려 있어 다리 불편한 내가 머물고 있는데 덕분에 사랑 많이 받고 배우는 것도 많다. 걷는 거 연습하느라 절뚝거리며 복도를 걸어가면 수녀님들은 마치 걸음마를 막 뗀 아기를 보듯 칭찬해 주신다. “장하구나!”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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