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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요한의 우물/요한 1장 (14)
깊이에의 강요
오늘은 복음의 한 장면 안에서 변화하는 예수님의 호칭을 좀 살펴보며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자, 요한은 자신의 제자 두 사람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들을 본 예수님께서 “무엇을 찾느냐?”하고 물으시니, 그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되물었습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에서 ‘라삐’로의 첫 변화입니다. 체험이 있고 나면 우리는 사물을 다르게 볼 줄 아는 또 다른 시선을 얻게 됩니다. 믿는 이들은 체험을 중심으로 하느님에 대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달라지곤 하는데요, 예수님에 대한 호칭의 변화는 곧 인간의 영적 성숙이며 그 영적 성숙은 우리 이름의 변화, 존재의 변화(시몬→베드로)를 가져옵니다. 요한의..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32-34절) 이번 주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두 번(31절. 33절)이나 말합니다. 그런 요한이 복음의 끝에서는 ‘과연 나는 보았다’(34절)고 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요한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보고 싶고 알고 싶은 마음으로 복음을 묵상하다 떠오른 것은 말없이 물속에서 머리를 숙였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내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요한 1,46)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굳이 드러내진 않아도 속으로는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무슨 좋은 것이 있겠나. 희망하는 것도 지친다. 기대를 접고 살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바랐던 내가 바보지… 그러면서 서둘러 피하고 포기하고, 마음을 접은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실패를 희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혼잣말에도 늘 응답이 있었다. 드러내지 못한 내 볼멘소리에도 늘 응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요한 1,39)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와서 보시오.” (요한 1,46) 타인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했다. 여기에 혼자 멈춰 있으면 볼 수도, 알 수..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요한 1,34) 세례 받을 필요가 없는 분이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33절), 이 모습을 보고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알아보고 증언하였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받아들이는 예수의 자세를 보고. 오늘은 '과연 나는 보았다'라는 문장을 곱씹었다. 요한은 무엇을 보았기에 알아보고, 증언할 수 있었을까. 나도 복음 속에서 요한이 본 '그것'을 보고, 알아듣고 싶었다. 그러다 말없이 물 속에서 머리를 숙였을 예수의 모습이 떠올랐다. 말하고 싶은 무언가가 자꾸만 올라와 답답해하고, 숙이고 싶지 않아 하루에도 몇 번이나 고개를 젓던 나를 위해서였을까. 그래,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성령이 내려와 머무르시는 ..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48) 나타나엘은 ‘지금’ 예수님을 만났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그를 보셨다. 필립보가 자신을 불렀고, 자신이 그분을 만나러 갔다고 생각했지만 그분이 먼저 그를 보셨고 필립보를 통해 불러들이셨다(47절). 언젠가부터 좋아진 복음의 한 장면이다. 갈곳 잃은 심정으로 아무도 없는 곳을 찾던 나, 하느님께만 내 마음을 겨우 내보일 수 있었던 나, 하느님을 부르기조차 힘들었던 나…를 보셨구나 싶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몰랐던 그때도, 내가 당신을 부르지 못하던 그때도 이미 나를 보셨고, 부르고 계셨다. 알아보지도 못하..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4-5) #daiyreading 큰 축일을 지내고 나면 마음은 접어둬도 몸은 일단 녹초가 된다. 화려한 장식과 다소 요란한 음악, 들뜬 사람들 무리를 뚫고 출퇴근을 하다가, 모처럼 잠잠해진 평일 저녁 일부러 퇴근길을 좀 둘러서 느긋하게 했다. 성탄이 끝나야 내게도 성탄이 온다. 화려하게 장식된 길을 걸어야 성탄이 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있어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 길을 걸어보기 전까진 내게 없는 길과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빛 역시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닫지 못한 ..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자 유다인들은 신경이 쓰여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이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던 역할이 바로 그리스도, 엘리야, 예언자인데 요한은 자신을 말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투영된 좋은 이미지, 그리스도와 엘리야, 예언자를 부정합니다. 아무리 좋은 이미지라고 해도 타인이 기대하는 '나'를 과감히 거부할 줄 아는 것. 여기에서 진짜 '나'를 찾아나서는 길이 시작됩니다. 나를 과시하고 포장해야만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에서 요한의 자기 부정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비워 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게 다가옵니다. 참 신앙인은 평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