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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마르코의 우물 (134)
깊이에의 강요
예수님께서 수난을 받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곧 수난과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알고 스스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구원자로 환영하며 빨마 가지를 흔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라고 외치던 이들이 머지않아 “십자가에 못박으시오!”하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얼마 후 당신을 죽이겠다는 아우성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예수님, 환호하며 흔들었던 뾰족한 나뭇가지들이 결국 자신을 찌르는 가시관이 될 것을 알았을 예수님, 다 아시면서도 그들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당신에게 닥친 모든 시간을 다 겪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성지 주일을 지내는 우리는, 같은 입으..
미국 본당에서 일할 때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입양된 한 소년이 사춘기가 되어 방황을 심하게 하자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갔습니다. 추운 겨울, 아들을 데리고 산을 넘고 넘어 도착한 곳은 산과 산 사이의 벌판 같은 곳이었는데 일부러 찾으려해도 어려울듯한 그 곳에 도착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전쟁 당시 대오와 떨어져 혼자 죽을힘을 다해 산속을 헤매던 군인에게 눈 덮인 산속 어딘가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합니다. 자신도 길을 잃어 얼어죽을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아기의 울음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얼마 후 아기와 엄마를 발견했습니다. 한 젊은 어머니가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서 아기를 살리기 위해 눈밭에서 옷을 모두 벗은 채 자..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다가 나병 환자의 조용한,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기까지 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낫게 해 달라고 엎드려 소리치며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넘을 수 없었던 경계를 넘어서(율법에서 나병 들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했기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대담하게 예수님 앞에까지 나아갔으면서도 왜 자신의 원의(저는 정말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원의(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인 양 말하는가. 무릎은 꿇긴 했지만 왜 애절하게 매달리거나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나. 왜 이렇게 점잖기만 한가. 나병은 감염된 후 피부 괴사가 일어나..
이번 주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은 이 더러운 영이 외친 말을 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회당 안, 어쩌면 우리 안에도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외치는 영이 분명 있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중요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잘못된 걸 알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필요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안타깝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맞는 말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믿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성당에 다니고 열심히 활동도 하긴 하는데 내가 불편해지는 것은 조금도 양보하지 못해서 내 안에..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형제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어떤 이들은 호수에 어망을 던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복음만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았다거나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던 그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은 곧바로 어망을 쥔 손을 빈 손으로, 그물을 손질하던 시간을 빈 시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다른 ..
대림 제2주일에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이’, ‘그분의 길을 곧게 내는 이’로서 마르코 복음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데요, 이번 주는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며 세례자 요한에 대해 묵상을 해보았으면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춥고 메마른 땅 광야에 홀로 살면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른 채 메뚜기와 들꿀만을 먹고 살 만큼 강단이 센 사람. 아니다 싶은 사람에겐 가차 없이 독화살 같은 말을 쏘아대기도 했고 예수와 버금가는 세력(당대엔 더 큰 무리의 제자를 두었다)을 오랫동안 유지할 만큼 권력형 사람. 예수 출현 이후 스스로 물러나 광야에 머물렀지만 여전히, 끝까지 가장 큰 '목소리' 역할을 한 사람. 초야에 묻혀 사라지는 유..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살아갈수록 세상에는 자연스럽게(나이로, 능력으로, 힘으로, 욕망으로...) 정리되는 서열에서의 꼴찌 말고 자처해서 낮은 자리나 보이지 않는, 힘을 부리지 못하는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이가 들거나 능력이 출중하지 못하거나 힘이 약해서 밀려나는 꼴찌 말고 이들을 앞세울 줄 아는 맨 마지막 꼴찌. 내가 앞서길, 내가 높이 오르길, 내가 드러나길 바라는 사람들 틈에서 고개 숙이고 시중을 들고 자신을 감추어야 하는 종처럼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섬길 줄 아는 종들을 위한 종. 시종일관 이렇게 살아왔다고는 말하지 못하지만 사순시기를 시작하려는 지금, 다시 엎드리고 내려갈 준비를 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르 9,5-6) #dailyreading 좀 더 젊은 수녀였을 땐 스승과 함께 지내고 싶은 마음이 왜 꺾여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만큼 걸어와 뒤돌아보니 그것은 꺾이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지는 과정이었다는 걸 수긍할 수 있다. 그래도 그때는 아팠지…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일이 늘 옳은 것은 아님을 오늘 또 배웠다. 하느님을 향한 길도 휠 수 있고, 방향을 틀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휜 길이라고 멈춰 선다면 영영 그곳에 갈 수 없다. 앞으로 곧장 나아가지 않는다 해서 도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