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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수녀님의 말씀향기 기고 (16)
깊이에의 강요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어릴 적에 한 달에 한 번 아버지와 함께 둘이서만 외출을 했습니다. 아마도 글을 읽기 시작할 즈음, 어쩌면 글이라기보다는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알아보기 시작할 무렵부터였을 것입니다. 용돈도 없고 문구도, 책도, 장난감도 그리 넉넉하지 않았던 시절, 아버지께서는 우체국에 저를 데리고 가시기 위해 우체국 옆 토마스 성당 1층에 있던 성바오로 서원에 들러 책을 한 권씩 사주기로 약속하셨던 겁니다. 그 특별하고도 귀한 선물을 받기 위해 매달 아버지를 따라나섰습니다.어린이였던 저는 『티코와 황금날개』(레오 리오니)를 펼칠 때마다 황금 깃털을 내어주며 살아가는 삶을 꿈꾸었고, 꽃봉오리 속에서 태어난 『엄지공주』(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만화책은 책이 닳도록 읽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재의 수요일 재의 예식 응송)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미사 없는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재의 예식도 할 수 없으니 혼자 예식서를 읽으며 묵상하던 중 이 응송의 말씀이 제 마음을 오래도록 붙들었고, 저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순시기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성사 없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감염시켰습니다. 병증이 가볍게 끝날 수도 있지만, 무시무시한 증상을 일으키고 죽음에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이 병의 감염 경로는 사실 너무나 평범하고 간단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예방 수칙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당연하고 간단하고 쉬웠는데 ..
일곱 살 유진이는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예수님은 여기 계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유진이는 얼음이 잔뜩 든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쭉쭉 빨아 마시더니 “아, 시원해. 예수님도 참 달콤하고 시원하시겠다.”라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원한 주스가 목구멍을 타고 가슴께로 넘어가는 걸 느끼면서 마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도 지금쯤 아주 시원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짝 웃었던 거지요. 언제쯤이면 우리도 유진이만큼 예수님의 현존을 단순하고 유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날 해맑게 웃던 유진이는 우리가 기쁘고 행복할 때 예수님도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시다는 것을,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