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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지금 여기' 계시는 예수님 본문

수녀님의 말씀향기 기고

'지금 여기' 계시는 예수님

하나 뿐인 마음 2020. 4. 25. 19:54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재의 수요일 재의 예식 응송)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미사 없는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재의 예식도 할 수 없으니 혼자 예식서를 읽으며 묵상하던 중 이 응송의 말씀이 제 마음을 오래도록 붙들었고, 저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순시기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성사 없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감염시켰습니다. 병증이 가볍게 끝날 수도 있지만, 무시무시한 증상을 일으키고 죽음에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이 병의 감염 경로는 사실 너무나 평범하고 간단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예방 수칙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당연하고 간단하고 쉬웠는데 그간 우리들이 안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했던 일이었습니다. 응송의 말씀처럼, 모르고 지었던 죄를 뉘우치며 살아야했고, 갑자기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없도록 모두가 삶을 돌아보며 회개할 시간이 필요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손을 자주 씻어야 하듯 우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수시로 성찰해야 함을, 신체적 접촉을 피하듯 이웃에게 과도한 행위를 삼가야 함을, 마스크를 끼고 대화함으로써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침묵으로도 친교와 위로를 나눌 수 있음을, 무엇보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깨달으며 남은 시간을 기도로 채우고, 침묵 속에서 기도할 줄 알게 되었지요. 더불어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알려야 하며, 무엇에 입을 다물어 주고, 무엇에 목소리를 모아야 하고, 무엇을 재촉해야 하고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조금씩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신부님과 우리 수녀들은 본당 신자들이 없는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사참례는 못해도 미사가 봉헌되기를 바라는 이들의 지향을 대신 올리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할 줄 모르고 기도할 시간이 없는 세상을 대신해 기도한다는 말을 매일 실감하면서 말입니다. 수도자들이 수도자의 가장 첫 번째 몫을 묵상했듯, 우리 신자분들도 다들 ‘필요한 것 한 가지’를 묵상하면서 보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부활대축일 미사도 할 수 없고 부활 행사도 하지 못해서 활기찬 부활의 기쁨을 느끼진 못하셨겠지만, 본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당신 모습을 이 지상에서 보여주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의 일상생활로 찾아오셨다는 것을 더 마음에 새겨보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예수님의 고통도 보았지만 예수님의 부활도 보았음을 기억하며 화려하고 매끈한 전례나 분주하고 요란한 행사가 아닌 소소한 ‘일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당에 가야만 만나는 예수님 말고, 내가 있는 ‘지금 여기’에 계시는 예수님을 말입니다. 

 

  인간적인 염려들마저 하느님께 드릴 때 얼마나 중요한 기도가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보내며,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립니다. 일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이어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형제자매님들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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