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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하느님의 얼굴(생활성서 7월호 특집 기고) 본문

수녀님의 말씀향기 기고

하느님의 얼굴(생활성서 7월호 특집 기고)

하나 뿐인 마음 2017. 6. 29. 21:01



일곱 살 유진이는 예수님이 어디 계시냐는 질문에 언제나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예수님은 여기 계셔.”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유진이는 얼음이 잔뜩 든 오렌지 주스를 빨대로 쭉쭉 빨아 마시더니 “아, 시원해. 예수님도 참 달콤하고 시원하시겠다.”라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시원한 주스가 목구멍을 타고 가슴께로 넘어가는 걸 느끼면서 마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도 지금쯤 아주 시원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활짝 웃었던 거지요. 언제쯤이면 우리도 유진이만큼 예수님의 현존을 단순하고 유쾌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 날 해맑게 웃던 유진이는 우리가 기쁘고 행복할 때 예수님도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시다는 것을, 매 순간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지요. 전 예수님의 현존을 묵상할 때마다 유진이 생각이 떠올라 자꾸 환하게 웃게 됩니다.


3학년 토마는 성당에서 집이 가까워 늘 조르르 달려서 성당에 오곤 했습니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동안은 매일매일 성당에서 놀 수 있으니 기쁜 마음으로 달려오곤 했는데요, 그날은 사정이 있어 조금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토마는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답게 달리기를 하면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지요. “예수님, 늦지 않게 성당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제가 신호등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예수님, 제발요.” 하지만 너무 급하게 달리다 보니 그만 어딘가에 걸려 토마는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속상하고 아파서 엉엉 울 법도 한데, 바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나 이렇게 다시 기도했답니다. “그렇다고 너무 세게 밀지는 마세요, 예수님” 그리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예수님께 윙크를 날리고 다시 씨익 웃으며 성당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지요. 저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환하게 웃던 토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살다 보면 최선을 다해 열심히 달렸는데도 넘어질 수 있고, 간절한 기도를 수도 없이 드렸다 해도 넘어지는 순간이 옵니다. 열심히 살다가 넘어졌으니 더 속상하고 아파서 울 수도 있고, 부끄럽거나 억울해서 화를 낼 수도 있습니다.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탓할 수도 있고, 성당에 가다가 일어난 일이니 예수님이 미워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토마처럼 예수님께서 살짝 밀어주셨다고 생각하고 씨익 웃으며 다시 달리기를 시작할 수도 있지요.


저는 본당에서 전교하는 수도자인지라 신자들을 자주 만납니다. 기왕이면 즐겁게 봉사할 수 있도록, 아이들이나 청년들도 신앙생활에서 힘과 위로를 얻길 바라는 마음에 편안하고 즐겁고 유쾌한 대화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일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이끌려 두 손이 묶인 채 제단 위에 오른 이사악의 심정에 대해 묵상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곧 불타오를 장작 위에서 자신을 내리칠 칼을 기다리는 이사악의 마음은 두려움과 혼란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움과 혼란만이 전부였을까요. 대구대교구 복현성당 대성전에 가면 이 장면이 색유리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작품에서 이사악은 생뚱맞게도 살짝 웃고 있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들여다보며 난생 처음으로 ‘온전히 바쳐지는 제물이 된다는 것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나아가 기쁘기 마저 하는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 자신을 온전히 바치겠노라 서원했던 제 첫서원 날도, 영원한 사랑과 봉헌을 약속했던 종신서원 날도 한없는 기쁨으로 가득했었군요. 햇살 가득한 날 그 색유리 앞에 서면, 노란색 유리의 이사악을 통해 성전 안으로 빛이 들어옵니다. 온전한 봉헌을 통해, 온전한 수동태가 되었을 때만 지을 수 있는 이사악의 웃음을 통해 빛이 들어오는 셈이지요. 진리에 눈감지 않고 정의를 실천할 줄 아는, 험담보다는 기도 한 번 더 올릴 줄 아는, 남을 탓하고 싶거나 이기적인 결정을 내리고 싶을 때 한 번 더 참고 견디는 나 자신이 될 때 우리는 더 자유롭고 당당하며 여유 있게 웃을 수 있고 이런 우리들의 웃음을 통해서도 분명 하늘나라의 행복이 세상에 전해지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서 안에서도 삶의 고통에 짓눌리고 슬픔에 겨워 울던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만난 후 기쁨의 웃음을 되찾았습니다. 비록 죄인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지만 많은 죄를 용서받았으니 큰 사랑을 드러낸다는 말을 들은 여인이 어찌 기쁘지 않았을까요?(루카 7,36-50 참조) 평소 죄인이라 불리던 세관장 자캐오였지만 예수님께서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시니 웃으며 맞아들일 수밖에 없지요.(루카 19,1-10 참조) 깨어 기다리다가 주인을 맞이한 종들은 행복했고(루카 12,32-48 참조)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중풍 병자와 그의 친구들, 치유를 지켜본 사람들(마태 9,1-8 참조)도 행복했을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체험하고, 함께 걷고, 먹고, 기도했던 이들이 어찌 기쁘지 않았을까요? 인간이 되어 오실 만큼 사랑하셨던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예수님도 어찌 행복하게 웃음 짓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무릇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루카 9,23) 제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묵시 19,7) 일도 게을리하지 않겠지요.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라.” (시편 100,2) 저는 오늘도 제가 만나는 이들의 웃음 속에서 그들과 함께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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