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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마르코의 우물/마르코 2장 (13)
깊이에의 강요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3절) 이 복음은(마르 2,1-5) 교리교사 3일 기도로 뽑은 둘째날 성경 텍스트였다. 그리고 기도 내내 '네 사람'이 마음에 들어왔다. 예수를 따르던 군중 중의 일부였을 사람들(3절)이었지만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갈 마음을 먹은 후 그들은 '네 사람'(3절)이 되었다. 그들도 예수를 보고 싶었을 텐데, 중풍 병자를 데려 가느라 노력과 시간을 써버리고 나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 앞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중풍 병자를 들고 계단을 올랐는데 지붕이 막혀 있었고 그들은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야 했다. 그리고 다시 힘을 내서 들것을 달아 예수님 앞으로 내려보냈다. 몇 번이나 가로막혔지만 끝까지 중풍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아침부터 심술이 나서 그럼 헌 포도주는 어떡하냐 따졌다. 새벽미사 내내,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라고만 하시고 헌 포도주는 박대하시니 이래도 되겠냐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오래된 포도주는 이미 잘 담겨 있지 않느냐 하신다. 새 포도주를 담을 부대만 잘 준비하면 될 일 아니냐 하신다. 꽁했던 마음만 들켜서 괜히 더 심술이 난다.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마르 2,4)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라고 왜 환난이 없을까. 복음을 묵상하며 들것에 중풍병자를 눕히고 예수님께로 나선 이들을 가만히 따라가 보았다.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기 위해 그들은 몇 번의 좌절을 맛봐야 했을까. 힘들여 들것을 들어야 했고, 군중에게 가로막혔고, 사람을 실은 들것을 들고 지붕을 올라야 했고, 막힌 지붕도 뚫어야 했고, 예수님 앞에 내려보내기까지 해야 했다. 조금만 힘을 들이면 되는 일도 아니었고, 가로막힐 일이 없지도 않았고, 단숨에 이루어지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 기도가 그렇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나. 우여곡절 없이 어떻게 깊은 기도가 되나. 기도가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dailyreading 죄인 취급하며 함께 음식을 먹는 것마저 꺼려하는 사람들이 있고, 죄인일지라도 초대하여 함께 음식까지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 상대방에 의해서 내가 달라지는 게 아니라 상대방을 대하는 내 태도가 나를 달라지게 한다. “그가 000이라서 내가 이러는 거야.”라는 말이 얼마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지... 방향을 바꾸는 건 내 몫.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10-11) 오늘은 예수님을 만난 후 중풍 병자가 해야했던 일을 묵상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스스로 일어나/ 그동안 나를 떠받치던 들것을 내 힘으로 들고/ 홀로 돌아가야 한다. 내가 의지하던 자리, 내 약함과 고통의 상징이자 안주와 자기 연민의 늪, 변명과 유혹의 자리인 들것을 들고. 요며칠 방정리를 하고 있어 더욱 이 장면에 마음이 머물렀나 보다. 이제 다리도 제법 나았기에 양호동을 떠나기로 했다. 인사이동 전에 방을 옮기는 게 당연한데도 나를 염려하시는 분들은 당장 누가 오는 것도 아닌데 좀 더 있다가 올라가라고 해주셨다. 그 마음을 알기에 말만으로도 고맙고 따뜻했다. 하지만 아픈..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 2,27) '위하여'에 대한 오해. 위하여 생겼다고 해서 쉽게, 마음대로 다뤄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나를 위한 모든 것들도 그렇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로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내 안에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내가 새 부대가 되는 수밖에. 끊이 없이, 부단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