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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엿보다 (203)
깊이에의 강요
우리 수녀원도 각자 시간되는 때에 만큼은 챙겨보기로 했다. 난 혼자서 봤는데, 희망을 어디에도 둘 수 없는 채로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도 있듯, 소용 없을 희망은 품고 바랄수록 고통만 키웠다. 어떻게 하늘도 돕지 않느냐는 생각이 절로 났지만 도와야 하는 건 사실, 하늘이 아니었다. 약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잠시 물러나는 거라고, 지는 싸움이 분명하니 이건 포기가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용기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악이 되었다. 악에겐 이런 것들마저도 보태는 힘이 되었다. 내가 나쁘게 하진 않았다, 죄는 아니지 않나, 어떻게 매번 옳을 수 있냐…는 자위적 합리화는 결국 내가 추구하던 정의마저 무너지게 했고 지금까지, 어쩌면 영원에 가..
갯벌이었던 때를 기억하며 바닷물이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마른 땅과 그 안의 수많은 생물들, 철새들. 얼마 전 읽은 (김지승, 난다)에서 "쓰레기가 쓰레기가 아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문장을 며칠 동안 곱씹었었는데 수라를 보다가 다시 이 문장을 만났다. 바닷물이 들어오길 기다리며 갯벌 아래에서 움츠리다가 비라도 내리면 희망을 품고 또 올라오는 존재들. 어떤 생물들은 바닷물을 만나지 못해 결국 죽지만 그 껍데기마저 품으며 다시 갯벌이 되기를 기다리는 땅, 생물들, 그리고 사람들. 쓰레기가 아니었던 때를 기억하려고 하기에, 지금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온전히 '욕하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갯벌이었던 때를 기억하려는 모든 존재들이 결국 세상을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시절에 붙들어 맬 수 있길 희망..
당연한 것들조차 모두 막아서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영화를 볼수록 불보듯 뻔할 것 같은 불안한 미래 때문에 솔직히 너무 불편했고, 스크린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영화의 끝은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현실로 이어졌다. 이렇게도 분명한 부조리… 스토리와 별개로 인상 깊었던 것은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이름이 ‘재기’였는데, 이름이 불릴 때마다 오염되었던 단어가 조금씩 먼지와 오물을 털어내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 의도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그랬다. 언젠가부터 잘못 해석되던 말, 더 나아가 혐오를 위해서만 발화되던 단어. 덧씌워진 것들을 조금씩 벗겨내며, 본래의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는 것. 내가 빚진 게 참 많다. 국민은행 009901-04-017158 ..
이런 영화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진실에 다가선다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내 시야를 가리는 앞선 의도가 선의이든 아픔이든 정의이든 연민이든 혹은 욕심이나 악의일지라도 걷어내야 진실에 다가선다. 산다는 건,악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마주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감히 상상도 못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사람들,
가장 마음에 남는 장면은 채 녹지 않은 강 얼음 위에 뼛가루가 얹히는 장면이었다. 채 녹지 않은, 녹기 시작했지만 얼음으로 덮힌 강. 뿌려졌지만 흐르는 강물따라 흘러가지 못하는 넋. 아래는 흐르지만 위는 흐르지 못하는 시간. 아직도 그럴 것이다. 아래는 부지런히 흘러가지만 여전히 위는 군데군데가 얼음이라 흐르지 못하고, 수많은 이들의 한 서린 넋은 온전히 떠나지 못하고 일부가 남았고, 차가운 얼음 위에 얹혀 흐르지 못한 혹한의 세월 위에 다시 얼어 붙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화면에 등장하고, 그보다 더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그 역사의 증인이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는 단어는 바로 ‘혼자’였다. 하나처럼 뭉쳤지만 맞서는 순간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혼자였다. 피를 나눈 형제라도 죽음의 길에선 ..
어릴 적 산수 시간, 선생님이 쓰시는 커다란 도구들이 부러웠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각도기와 콤파스, 삼각자들은 어쩐지 '작은' 문제들만 풀 수 있을 것 같았고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각도기는 360도보다 더 큰 각을 잴 수 있다고, 콤파스도 삼각자도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것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내 앞에 막 펼쳐진 멋진 숫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큰' 도구들. 하지마 얼마 안 가 내가 지금 재고 있는 각도와 선생님이 나무로 만든 큰 각도기로 재고 있는 각도가 동일하고, 다만 동일한 각이라 해도 양변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더 많이 벌어져 '보인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작은 각도라 해도 변의 길이가 길어지면 그 끝의 차이는 커다란 칠판보다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해야할지. 그저 가만히 앉아 가만히 영화를 보고, 가만히 영화관을 빠져 나왔다. 사소한 것들이 우리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고, 그 아픈 마음은 우리들 틈을 얼마나 갈라놓는지. 가만히 앉아 팔짱을 낀 채 삼십 년도 넘은 시간으로 흘러갔다가 며칠 전 시간으로도 흘러갔다가 영화인 건지 내 마음인 건지 가늠해보다가. 우리들 사이의 사소한 차이가 나 자신을 얼마나 주저하게 했던가. 그렇게 주저하다가 얼마나 서로를 할퀴었던가. 아픈 마음에 나는 얼마나 움츠렸던가. 그보다 더 많이는 겁먹은 걸 감추기 위해 사납게 소리쳤던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라 생각했던 그때, 아주 작은 용기로도 바꿀 수 있었을 순간들. 그러지 못해 후회가 된다기 보다는, 그때의 나에게 선이 엄마가 그랬듯 "선아, 엄마한..
엑소시즘 이야기니 당연히 종교적 내용이 있어야 하나, 수녀의 이미지가 이렇게 다뤄질 줄은 몰랐다. 우스개소리로 가장 사악한 악령이 하필 수녀 베일을 쓰고 나오는 바람에 사람들 무서울까봐 기다렸다가 다 나가고 난 후에 나왔다고 했지만, 실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내겐. 가장 사악한 악마는 가장 고결한 이미지를 사용한다던 말. 공포를 위해 가장 효력있는 이미지가 고결한 이미지요, 그 고결한 이미지가 수녀라는 설정?은 적어도 나에겐 가볍게 넘어갈 만한 일이 아니지. 때묻지 않은 고결함이 내 수도생활의 목적이 아니어야 함을, 나만을 위해 나를 거룩하게 유지하지 말아야 함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