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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엿보다 (203)
깊이에의 강요
인터스텔라 보고 와서 내내 "끌어당김"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다. 무언가가 우리를 끌어당기면 그때부터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법. 거대한 우주가 보내는 위대한 사랑이야기 같은. 하지만 내겐 여전히 인식 저 너머의 이야기.
렉시오 디비나반 청년들과 야곱 신부의 편지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 마음에 들어오는 내용은 '눈 감음'이다.의심을 거두지 못해 눈 앞에다 칼을 들이대어도 볼 수 없었기에 안심시킬 수 있었던 장면과 그녀가 더이상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하여 목에 줄을 감고 세상과 작별하려던 순간에도 야곱 신부는 그 곳에 있으면서도 목격해주지 못함으로 인해 그녀를 살린다. 마치 하느님의 "다 잊었다"처럼 말이다. 세 번째 보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했다. 마음에 남은 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낯설고 새로운 영화를 보듯 기억과 바램을 더듬었는데, 내 마음대로 그려가는 플롯은 내게 있어 또 다른 생각거리였다. 그녀가 택시를 타고 낡은 성당으로 돌아가기를, 혹은 집을 정리하고 신부님을 기다리기를,..
좀처럼 떠나지 않는 질문. 내 삶을 들여다봐도, 책을 읽어도, 이웃들을 둘러봐도, 뉴스를 검색해봐도, 어둠 속 수녀원 성당에 홀로 앉아 있어도 그래, 좀처럼 떠나지 않는 질문. 나는 누구와 싸우고 있을까. 우리는 과연 누구와 싸우고 있을까.아니면 우리는 누구와 싸워야 할까. 모든 국회의원들이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데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만 있고 정작 국민들은 낭떠러지다.하느님 나라를 위해 신부 수녀가 되어 살아가면서도 좀처럼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을 때가 많다.하느님을 믿으며 바르게 신앙 깊은 기도 생활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가 바람 잘 날이 없다.아픈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병원에서 사람보다 돈이 중요하고,억울한 사람들을 위해 법 질서를 유지해야할 법원에서 사람보다 돈이 중요하고,하늘 나라를..
손톱이 자라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손가락 끝을 다쳐서 오랫동안 새 살이 돋아나길 기다리던 시기. 내 왼손 손가락의 손톱들은 하나같이 성장을 멈추었었다. 겉으로 상처가 아무는 데에만 거의 반 년이 걸렸었다. 다친 손가락에 모든 영양분을 몰아주느라 더 이상 자라기를 거부하던 손톱. 6개월 정도가 지나니 다친 손가락의 손톱만 자라지 않았지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경이로운 시간이었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 손가락들은 기특하게 서로를 도와주고 있었고 다친 하나를 살려내기 위해 성장을 거부하고 기꺼이 희생하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그때는 눈으로 보이는 외적 성장을 멈추었는진 몰라도 그 어느 때보다 내적으로 깊이 자라났을 시기이다. 연대의 책임이 당연했던 것이다. 그게 자연스럽고 옳은 일이었다는 판단이었을 ..
결국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상대방 역시 사랑할 수 있나보다. 나를 진정 사랑하는 것. 서로를 공유하지 못하고 어느 한 편이 차지해야 하는 것이 사랑이라 여겼던 한 남자와잘해주려고만 하다가 결국 소진되어 버린 한 남자,그리고나 자신을 통해서만 '너'를 보려했던 한 여자. 우리가 다들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비단 남녀의 사랑 뿐만이 아니라.
조디 포스터의 브레이브 원이 생각나는 영화. 이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을까. 이성과 심정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마주보게 만드는 영화. 이미 내 안에서 벼려진 칼날은 서슬 퍼렇게 날이 섰고 겨누고 싶은, 어쩌면 겨누어져야 한다는 당위성 마저 지닌 대상을 향해 방향을 틀었지만,수백 수천 가지의 마땅한 이유들이 그래서는 안된다는 오직 하나의 이유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방황하는 칼날. 대체가 가능한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백번 천번 죽인다 해도 도저히 상쇄될 수 없는 것이 있고,그 무엇으로도 (내 목숨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있다. 살인자가 되어버린 아비에게용서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무너뜨리면서까지 상대를 응징하기보다, 차라리 용서를 택하시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로메로 주교 영화를 봤다. 약한 이들, 억눌린 이들을 위한 마음을 끝내 거두지 않는 것. 미움으로 사랑을 끄지 않는 것. 정치적인 문제들과 얽혀서 시국미사 기사가 나올 때마다 언급되는 로메로 주교님이지만 이번에 볼 때는 서로 반목하여 싸우는 한 나라의 사람들 혹은 한 공동체 내에서 서로를 미워하고 공격해대는 '한 공동체' 사람들을 바라보는 '종교인'의 이야기처럼 보였다. 실제로 로메로 주교님은 병원 내에서 미사를 드리다가 암살당하셨다. 영화에서는 성작이 높이 쳐들리던 순간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그 누구도 자기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순간, 신자건 사제건 자신에게서 눈을 돌려 죽음 직전의 예수, 곧 제물로 바쳐질 예수를 바라보는 그 순간에 상대는 총을 겨누었다. 우리는 상대의 어디를 바라보는가. 가장 약한..
유대인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종교인들을 수용한 다하우 수용소. 반나치 운동을 하다 잡힌 크레머 신부도 이곳에 수감되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고문과 조롱,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가득찬 곳.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기도 하겠지만 삶보다 죽음이 더 고귀하고 싶은 사람들이 바로 종교인이 아닐까. 삶의 의미도 죽음의 의미도 미처 찾지 못한 채 기약없는 시간 앞에서 죽음만을 목도하는 곳. 인간적 양심과 사제로서의 양심을 간직하는 것 자체가 증오의 표적이 되는 곳. 순교마저도 할 수 없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곳에서 벌레보다 값어치없이 맞이하게 되는 죽음의 공간. 출옥인 줄 알고 나선 길이 9일 간의 외출이었고, 나치에 동조하도록 룩셈부르크 대주교를 설득하는 임무마저 주어진다. 회유시키지 못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