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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부산행 본문
어릴 적 산수 시간, 선생님이 쓰시는 커다란 도구들이 부러웠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각도기와 콤파스, 삼각자들은 어쩐지 '작은' 문제들만 풀 수 있을 것 같았고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각도기는 360도보다 더 큰 각을 잴 수 있다고, 콤파스도 삼각자도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큰 것들을 상대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내 앞에 막 펼쳐진 멋진 숫자의 세계를 지배하는 듯한 '큰' 도구들. 하지마 얼마 안 가 내가 지금 재고 있는 각도와 선생님이 나무로 만든 큰 각도기로 재고 있는 각도가 동일하고, 다만 동일한 각이라 해도 양변의 길이가 길어질수록 더 많이 벌어져 '보인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무리 작은 각도라 해도 변의 길이가 길어지면 그 끝의 차이는 커다란 칠판보다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때부터 난 시작의 미약함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때의 충격이 내게 선사한 '미약함이 가져올 창대함과 결코 분리해서 받아들여선 안되겠구나.'라는 깨달음. 부산행이라는 영화도 첫 장면에서 작은 시작, 곧 미약한 시작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내내 양변의 길이는 걷잡을 수 없이 길어진다. 엇나간 시작이 가져오는 재앙.
실수로 동물을 죽이고도 자신의 차만 걱정한 후 침 한 번 탁 뱉고 재수가 없다며 떠나버리는 남자. 자기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상대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해를 입히고도 잘못에 대한 인정은 커녕 나의 길을 방해한 존재로 치부하며 힐난과 저주를 주저하지 않는, 가해자이면서도 피해 입은 상대를 가해자로 몰아버리는... 이런 작은 행동들이 거리낌 없이 행해진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