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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요한의 우물 (118)
깊이에의 강요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요한 8,41) #dailyreading 공허한 말이다 싶었다. 거짓도 아니요, 그렇다고 참도 아닌 이 말은 얼마나 텅 비어 있는지. 이 말을 한 사람들은 '당신(예수님)을 믿는 유다인'(31절)이었다. 나의 말은, 예수님을 믿는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진짜일까. 사람들이 한 이 말의 진실 여부는 말 자체에 달려 있지 않다. 그 말을 한 사람의 마음 속 생각과 행위, 삶이 증명해야 참이 된다. 우리의 기도도 기도 만으로 완성되지 않고 내 생각과 행위, 삶 자체가 '아멘'으로 울려 퍼져야 비로소 참이 된다. 오랜 만에 본원에 갔는데 계절이 계절이라 온 동산이 꽃들로 가득했다. 성모상 근처 바위 옆에 무더기로 피어나는 이 꽃은 조팝나무인데, 사람들이 이팝나무로 혼동하..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요한 8,7.9) #dailyreading 복음을 묵상할 때마다 그렇게 보고 싶지 않았던 이 장면의 남자들. 그런데 오늘은 '그래도 이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줄은 알았구나.' 싶었다. 적어도 부끄러운 줄 알고, 뒤늦게라도 사라질 줄 아는 사람들. 현대인의 대화는 상대를 향한 맹렬한 비난이 난무한다. 우리는 곧잘 타인의 죄를 나의 올바름으로 착각하고 떳떳하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무나, 그 누구라도 비난한다. 수치심 없는 공격성. 주님, 부끄러움을 알게 하소서. 자신을 돌아보고, 뉘늦게라도 뉘우칠 줄 알게 하소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죽었던 이가 손과 발은 천으로 감기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싸인 채 나왔다. (요한 11,43-44) #dailyreading 꽁꽁 묶인 채로 어둠 속에 갇혀, 죽음에 갇혀, 동굴에 갇혀 있던 라자로. 천으로 감긴 손과 발로, 수건으로 감싸인 얼굴로 자신을 부르시는 예수님께로 걸어가는 라자로를 묵상했다. 하지만 묵상을 하다보니 자꾸만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뒤돌아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라자로의 뒤에서,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께로 가기 위해 무덤을 나가고 싶지만 감긴 손과 발이 불편하고 감싸인 얼굴이 어색해 그만 멈추고 싶어하는 내가 있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싶고 멈추어도 괜찮다 싶어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도, 나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일어서고 싶어..
우리는 모두 '라자로'입니다. 라자로를 벗으로 삼으시고 사랑했던 예수님(3절.5절.11절.36절)께서는 우리도 친구라 부르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자’라는 뜻의 이름의 라자로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지요. 라자로를 살리듯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살리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들으시고도 왜 한걸음에 달려가 치유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비록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혔다고 하더라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서 서둘러 가시지 않고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을까요? 이번 주는 지난 주 태생소경 복음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유다인들은 넷째 날이 되면 영혼은 멀리 떠나가고 본격적으로 ..
지난주에는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던 여인의 변화를 들었다면, 이번 주는 처음부터 볼 수 없었던 사람, 태생 소경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태생 소경을 가리킬 때 ‘남자’를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 아네르άνήρ를 쓰지 않고 ‘인간’이나 ‘인류’를 가리키는 안트로포스άνθρωπος를 씀으로써(창세기의 ‘아담’처럼)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으로 눈이 먼 존재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복음사가는 이미 로고스 찬가에서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목적이 영적으로 눈먼 인간에게 하느님을 보여주려는 것임을 밝혔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1,18) 하느님을 본 적 없는(=태생 소경) 인간에게 하느님을 알려주시는 분 ..
Painting by Helen Cherkasova. Christ and the Samaritan Woman. 이번 주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오는 복음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5)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말입니다. 이 여인은 안좋은 소문에 휘말려 있어서 사람이 없는 시간인 정오 무렵,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어쩔 수 없이 햇볕이 가장 뜨거운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사람들이 없으니 수군거림은 피할 수 있겠지만, 아무도 다니지 않는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홀로 물동이를 짊어지고 걸어야 했을 것이고, 무거운 우물 뚜껑을 열어주거나 물동이를 이는 것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32-34절) 이번 주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두 번(31절. 33절)이나 말합니다. 그런 요한이 복음의 끝에서는 ‘과연 나는 보았다’(34절)고 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면서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요한은 도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예수님을 알아보고 증언할 수 있었을까요. 보고 싶고 알고 싶은 마음으로 복음을 묵상하다 떠오른 것은 말없이 물속에서 머리를 숙였을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요한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내려..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요한 1,46)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굳이 드러내진 않아도 속으로는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무슨 좋은 것이 있겠나. 희망하는 것도 지친다. 기대를 접고 살아야 마음이 편안하다. 바랐던 내가 바보지… 그러면서 서둘러 피하고 포기하고, 마음을 접은 나를 정당화하기 위해 실패를 희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 혼잣말에도 늘 응답이 있었다. 드러내지 못한 내 볼멘소리에도 늘 응답하셨다. “와서 보아라.” (요한 1,39) 직접 말씀하시기도 하고 “와서 보시오.” (요한 1,46) 타인을 통해 말씀하시기도 했다. 여기에 혼자 멈춰 있으면 볼 수도,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