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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요한 11,1-45 우리는 모두 라자로입니다. (가해 사순 제5주일 레지오 훈화) 본문

요한의 우물/요한 11장

요한 11,1-45 우리는 모두 라자로입니다. (가해 사순 제5주일 레지오 훈화)

하나 뿐인 마음 2023. 3. 23. 22:19

 

우리는 모두 '라자로'입니다. 라자로를 벗으로 삼으시고 사랑했던 예수님(3절.5절.11절.36절)께서는 우리도 친구라 부르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자’라는 뜻의 이름의 라자로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지요. 라자로를 살리듯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살리고 계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들으시고도 왜 한걸음에 달려가 치유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비록 라자로가 죽어 무덤에 묻혔다고 하더라도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라자로를 살리기 위해서 서둘러 가시지 않고 왜 이틀이나 더 지체하셨을까요? 이번 주는 지난 주 태생소경 복음보다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째 되는 날(유다인들은 넷째 날이 되면 영혼은 멀리 떠나가고 본격적으로 시신이 부패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날, 일말의 희망조차 없는 날에 라자로를 살리셨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어두운 밤 시간이 옵니다. 짙고 짙은 어둠. 하지만 우리는 일말의 희망조차 없다고 여겨지는 때에도 우리를 살리실 분이 계심을 기억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더 환하게 볼 수 있듯 우리는 때때로 어둠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을 더 뚜렷이 느끼고 체험할 것입니다. 
 
  라자로에게 일어난 이 일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언젠가 죽어서 땅에 묻히겠지만 우리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00야, 이리 나와라.”하고 큰 소리로 외치실 것이고, 라자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일어난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갈 것입니다. 더불어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었을 때에만 우리 이름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시고, 살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짓거나 어떤 이유로든 영적으로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와 다시 살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인생의 비참함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의 그 무엇인가가 죽어있다’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무질서한 애착과 어두운 모습, 충동적인 악습과 증오, 도를 넘은 경쟁욕과 소유욕, 명예심과 시기, 교만과 질투에 휩싸여 스스로 만든 감옥에, 무덤에 갇혀 생명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은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지금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매순간 찾고 만나는 사순 5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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