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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요한의 우물 (118)
깊이에의 강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 21,12) 두려워 도망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도 어려워, 예수님께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또 먼저 다가오신다. 그리고 배가 찢어질 만큼 고기를 잡도록 해 주시고 베드로는 그제서야 예수님을 알아 본다. 이 복음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쯤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걸 묵상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으셨고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셔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뭍에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결국 제자들이 당신을 찾아오도록 기..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요한 21,10) #dailyreading 아낌 없던 베풀 줄 알았던 선행, 밤새워 올린 기도, 갈고 닦아 처음으로 바쳤던 다짐이 분명 필요했지만 ‘그때의 나’가 ‘지금의 나’는 아니다. 열심했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지금 내 손에 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나는 빈 손이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하신다. 그러니 보잘 것 없더라도 방금 행한 선행을, 서툴더라도 방금 올린 기도를, 설익었더라도 방금 새롭게 다짐한 서원을, 방금 잡은 고기를…
다해 사순 제5주일 요한 8,1-11 예수님은 여인을 끌고 왔던 이들이 떠나갔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모두 의도적인 질문이지요. 알고 있지만 다시 한 번 물으심으로써, 여인에게 더 이상 죽음의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당신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배려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비추어,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한 번 돌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간혹 자신의 기준에서 잘못했다고 판단된 사람에게 무자비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치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되는 권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해도, 내게 그 사람을 마음껏 조롱하고 가해..
유아 세례를 받았고 아기 때부터 성당을 다녔지만 이십 대 이전까지는 수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싫어서는 아니고, 그냥 나의 선택에 지금의 삶이 없었다. 이후 교리교사를 하면서, 성경 모임을 하면서 여지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내 마음 속 갈망을 조금씩 발견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해도 될까. 나는 수녀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을 더 잘 따르고 싶었다. 세상엔 좋은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고 내게 가장 좋은 일이었다. 기도를 해도 봉사를 해도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께로 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수도삶이 최선이었고, 나는 그렇게 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힘든 일이..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4-5) #daiyreading 큰 축일을 지내고 나면 마음은 접어둬도 몸은 일단 녹초가 된다. 화려한 장식과 다소 요란한 음악, 들뜬 사람들 무리를 뚫고 출퇴근을 하다가, 모처럼 잠잠해진 평일 저녁 일부러 퇴근길을 좀 둘러서 느긋하게 했다. 성탄이 끝나야 내게도 성탄이 온다. 화려하게 장식된 길을 걸어야 성탄이 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있어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 길을 걸어보기 전까진 내게 없는 길과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빛 역시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닫지 못한 ..
보고 믿었다. (요한 20,8)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에 무작정 예수님을 보려고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 그들이 본 것은 덩그러니 개켜 놓여진 아마포와 수건, 빈무덤이었지만, 그들은 그 빈무덤을 보고서 믿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었다. 그러니 볼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으니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하게도 하고 반대로 어둡게도 할 수 있다. 보여지는(그분이 보여주시는) 것이라면 빈무덤을 보고서도 부활하신 분의 존재를 믿을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증거만을 찾는다면 우린 아주 오래도록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dailyreading ’서로’에 대해 생각한다. 평등하고 균등하게 주고 받는 사랑이 어디 있겠냐마는, 무심하면 무례할 수 있고, 마음을 쓰지 않고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과는 ‘서로’라는 관계가 성립되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서로 노력해야 한다. 서로가 해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