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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0/12 (13)
깊이에의 강요
좋아하는 성경 인물 중 하나이다. 고백하자면, 정성껏 말씀을 들여다보는 렘브란트의 그림에 반해서 좋아하게 되었고 언젠가 노수도자가 되어서도 이 한나처럼 말씀을 늘 붙들고 살고 싶었다. 덕분에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더 깊이 묵상하게 된 인물이다. 사실 성경은 한나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들려준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한나는 사회 통념상 불리한 조건을 가..
김담. 아마존의 나비. 책을 소개해주신 분이 '여성작가의 맑고 묵직한 숲 에세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맑고 묵직한 산문이었다. 작가의 고향인 강원도 고성에서 살며 만난, 인간 삶의 일부인 자연을 들려준다. 작가는 경관 소개에 그치지 않고 그날 그곳의 자연 그대로를 보여주고 들려주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잊지 않는다. 미국 사는 몇년 동안 기회가 닿는대로 서점이나 미술관, 박물관을 갔었는데 지금은 어딘지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미술관, 아시아 전시회에서 벽을 가득 채운 중국 병풍을 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전시관 한쪽 벽을 꽉 채운, 그 병풍이 생각났다. 빼곡하게 정성껏 수놓아진 거대한 열두 폭 병풍. 더불어 병풍도 구부려야 한다는 속담처럼, 바른 길이라 해서 마냥 주장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이 책..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마태 2,16) 루카스 수녀가 그린 그림 때문일까, John Rutter의 새 캐롤 Joseph's carol 때문일까, 올해 성탄은 요셉 성인을 자꾸 묵상하게 된다. 오늘 복음도 요셉의 꿈에 나타난 천사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13절)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는 천사의 말에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어머니를 깨워 먼 길을 떠났다. 얼마나 고단..
전소영. 달그림. 홍제천 산책을 하며 본 풀들을 그린 그림책. 이 책은 정말 꼭 직접 '봐야' 하는, 들꽃 화첩이다. 그림만으로도 작가가 어떤 마음으로 산책을 하고 풀꽃들을 지켜봤는지 알 것 같았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얼마나 감탄을 했던지... 풀과 꽃 하나하나가 너무 예쁘고 다정해서 세수장 위에 작품처럼 올려놨다. 2-3일에 한 번씩 페이지를 바꾸고 그림 감상을 한다. 작은 갤러리에 온 것 같고, 내 방이 따뜻하고 우아해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세상엔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었다. 꽃이 피고 지는 일에도, 작은 열매의 생김새에도 이유가 있다. 당장은 시리고 혹독하지만 지나고 보면 소중한 겨울처럼.
김기란. 책읽는수요일. 시각예술 작업을 하는 작가의 종이 작품집. 작품 해설 같기도 한 단상과 함께. 우린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가진 것으로 세상을 보고 드러낸다. 제자리 가야 할 길을 한참이라 마음은 저 멀리 자리한데 당신은 어찌 긴 세월 한자리를 지키고 계시나요
김소영 에세이. 사계절. 책이 나오자마자 너도나도 책을 읽고, '반했다'는 말을 하는 동안 혼자 애가 탔었다. 아, 나 누구보다 먼저 읽고 싶은데 다리 덕분에 나갈 수가 없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나. 너무나 너무나 읽고 싶었던 나는 목발 없이는 한 발짝도 못움직이는 상태일 때였지만 결국 봉고를 타고 책방이층까지 일부러 가서 책을 샀다. 제대로 읽어보려고 일부러 기다렸다가 쉬는 월요일에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 후다닥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포스트잍을 붙이느라, 반성하느라, 상상하느라, 추억하느라 책은 더디게 넘어갔다. 읽기도 전에 친근한 마음부터 들어 가볍고 편안한 마음이었지만 마음자세도 읽는 자세도 조금씩, 자꾸만 정중해지던 책. 편하지만 예의바른 사이, '안녕' '미안..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열린책들. 요즘처럼 면역, 백신에 대해 많은 말을 듣고 많은 글을 읽은 적은 없었다. 앞으로도 있을까 싶을 정도인 세상, 나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다.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한 책이었지만,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운 글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섣불리 말하고 판단하는가 돌아보게도 해 준 책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아는 사람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에 가깝다는 것도 알게 해 준 책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혹은 조금 많이 안다고 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확신을 가지고 생각하고, 쉽게 퍼뜨리고 강요하며,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판단까지 한다. 이 책은, 나 역시, 백신을 접종하자고도, 하지 말자고도 말하지 않는다. 수많은 책들이 그렇지만, 이 책도 ..
세례를 베푸는 요한에게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자 유다인들은 신경이 쓰여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은 이 질문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기대하던 역할이 바로 그리스도, 엘리야, 예언자인데 요한은 자신을 말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투영된 좋은 이미지, 그리스도와 엘리야, 예언자를 부정합니다. 아무리 좋은 이미지라고 해도 타인이 기대하는 '나'를 과감히 거부할 줄 아는 것. 여기에서 진짜 '나'를 찾아나서는 길이 시작됩니다. 나를 과시하고 포장해야만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세상에서 요한의 자기 부정은 자기 자신을 비우고 비워 낸 자리에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게 다가옵니다. 참 신앙인은 평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