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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0/12 (13)
깊이에의 강요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마태 11,17) 묵상하다 보면 말씀 중에서 잘 걸려 넘어지게 되는 구절이다. 쉽게 들뜨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거라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냉정하고 무심해서일 때가 많았던 걸 알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도 그랬다. 말씀은 내게 휘몰아치는데 정작 나는 무심하거나 모른척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의 무정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멈추신 적이 없다. 오늘 따라 이 구절이 참 아프다. 피리를 불며 춤추라 강요하진 않되 누군가 피리를 불면 적어도 흥얼거릴 수 있는 사람, 곡을 하며 눈물을 요구하진 않되 누군가의 곡에 잠시 멈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무엇보다 그분이 추시는 춤사위가, 그분이 부르시는..
콘스탄틴 비르질 게오르규 신부 지음. 박노양 옮김. 정교회출판사. 목발 짚고 본원으로 들어온지 며칠 안되었을 때 도서관 좁은 통로를 휠체어로 다닐 엄두가 안나서 눈으로만 도서관 입구를 바라보며 다니던 나를 보셨는지, 어느 날 도서관 수녀님께서 “00 읽어봤어? 를 쓴 작가이자 신부님인 분의 책이야.” 하셨다. “아니요, 수녀님!!!” 분원에 살면 마음껏 영성 서적을 구입하고 읽는 것이 쉽지 않아 본원에 들리게 되면 메모해 뒀던 영성서적을 빌려가곤 했기에, 기왕 이렇게 본원에 머무는 기간 동안 보고 싶었던 영성 서적을 잔뜩 읽어야지 하고 내심 기대하고 있었던 터였다. 기쁨이 역력했을 나의 대답에 수녀님은 쓱 웃으시며 책을 한 권 들고 나오셔서 “수녀님 책 보는 거 좋아하잖아. 대출 카드 내가 적어줄테니 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마태 11,11) #dailyreading 며칠 전 올겨울 처음으로 아침 온도가 영하로 내려간 날의 사진이다. 날이 추워지니 시동이 걸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야 공기가 데워지고 핸들도 너무 차가워 아침 출근이 그리 달갑지 않았었는데, 그날 앞유리에 와이퍼 자국을 따라 피어난 성에꽃을 보는 순간 생각을 달리 먹어야겠구나 하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늘 보던 하늘, 잎을 다 떨구고 난 느티나무, 불마저 꺼진 키작은 가로등, 피정집의 뒷모습, 허름한 스타렉스 앞유리창, 그리고 성에... 평소의 내게는 사실 별스러울 것 없었던 각각의 존재가 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마태 7,24-25) 우리는 하느님을 따르며 살아갈 때조차 더 이상 내 삶에 비가 내리지 않길, 강물이 밀려오지 않길, 바람이 불어 들이치지 않길 원한다. 하지만 하느님이 내게 주신 삶에는 수시로 비가 내리고, 때론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내 집에 들이친다. 우리의 삶은 비도 강물도 바람도 없는 삶이 아니라 비와 강물, 바람에도 불구하고 든든한 반석 위에 지어진 집이라 무너지지 않는 삶이다. 아픔도 시련도 없는 삶이 아니라 거듭되는 우여곡절을 겪어도 그분 안에서 무너지지 않는 삶. 무너지지 않는..
많은 군중이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다가왔다. 그들을 그분 발치에 데려다 놓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5,30) 오늘 묵상 때는 눈을 감고 조용히 복음 장면을 그려봤다.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가시고, 다시 산에 오르셔서 자리를 잡으시는 장면. 누군가를 기다리듯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에 먼저 자리를 잡으셨다. 곧 예수님께로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든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장면을 마음 속으로 그려봤다. 다리저는 이들과 눈먼 이들과 다른 불구자들과 말못하는 이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이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은 어땠을까. 근심과 아픔이 여전하지만 새롭게 품은 희망을 간직한 표정. 믿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