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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어린이라는 세계 본문

雜食性 人間

어린이라는 세계

하나 뿐인 마음 2020. 12. 27. 09:19

김소영 에세이. 사계절.

 

책이 나오자마자 너도나도 책을 읽고, '반했다'는 말을 하는 동안 혼자 애가 탔었다. 아, 나 누구보다 먼저 읽고 싶은데 다리 덕분에 나갈 수가 없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했나. 너무나 너무나 읽고 싶었던 나는 목발 없이는 한 발짝도 못움직이는 상태일 때였지만 결국 봉고를 타고 책방이층까지 일부러 가서 책을 샀다. 제대로 읽어보려고 일부러 기다렸다가 쉬는 월요일에 읽기 시작했는데, 내용이 너무 좋아 후다닥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포스트잍을 붙이느라, 반성하느라, 상상하느라, 추억하느라 책은 더디게 넘어갔다. 읽기도 전에 친근한 마음부터 들어 가볍고 편안한 마음이었지만 마음자세도 읽는 자세도 조금씩, 자꾸만 정중해지던 책. 편하지만 예의바른 사이, '안녕' '미안해요' '고마워'를 생략하지 않는 사이가 내가 좋아하는 사이인데, 이 책과도 그런 사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성당에서 교리교사라는 걸 시작했었다. 희망 학년을 적어낼 때 6학년 5학년 4학년 순서로 적었는데 내게 유치부가 주어졌고(정말 속상해서 울고 싶었다...) 나는 그 이후로 교사를 그만두기 전 5년간 유치부 교리만 했다. 교재도 없이 유치부 아이들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는 정말 별의별 것을 다 배우고 준비했었던 것 같다. 어려운 교리 언어를 아이들 언어로 풀기 위해 더 꼼꼼히 공부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이야기가 풍부해야 한다 싶어서 바오로 서점을 수도 없이 오갔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만들기 수업도 들었고, 포스터칼라를 사서 그림을 그려가며 슬라이드도 만들었고, 피아노도 연습했다. 이 많은 준비들이 하나도 아깝지 않게, 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수도 없이 만났고 위로 받았고 사랑을 얻었고 마침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지금도 주일학교 아이들을 보면서 사랑하며 사는 법을 배운다. 누군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더니 나는 수녀로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수많은 것을 주일학교 교리교사를 하면서 특히나 유치부 아이들을 만나면서 다 배웠다. '그동안 받은 것을 나누기 위해서'라는 커다란 포부로 시작한 교리교사였지만, 그동안 받은 것도 모자라 더 엄청난 것을 '받은' 시간이었다. 사람으로 다듬어지던 시간... 내가 아이들을 대하던 바로 그 자세가 나 자신을 대하던 자세였고,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증명해준다.

 

책을 통해 배운 것은 내 삶으로 실천하면서 살아야겠지만, 더불어 어떻게 하면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성경과 이 책만 가지고도 넉넉하게 교리교사들을 위한 피정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벌써 몇몇 이야기들은 교사들이 읽고 묵상하게 하려고 골라두었다. 그리고, 수도원 본원 도서관에 기증해야겠다. 우리 수녀님들, 모두모두 이 책 읽으시라는 큰 포부를 품고서^^

 

포스트잍을 많이도 붙였지만 그 중 하나를 골라보자면 바로 이 말이다.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쓰면서 알게 된 한 가지는, 어린이라는 세계는 우리를 환대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어린 시절’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어린이들의 진솔한 모습 때문인지 모르겠다. 어린이라는 세계가 늘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어린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우리 세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른이 되면서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
그러자 현성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와 어른은 함께 자랄 수 있다."
 
"어린이에게 ‘착하다’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에 세상이 거칠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착하다는 말이 약하다는 말처럼 들릴 때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착하다’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착한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어른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어린이를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정중한 대접을 받는 어린이는 점잖게 행동한다. 또 그런 어린이라면 더욱 정중한 대접을 받게 된다. 어린이가 이런 데 익숙해진다면 점잖음과 정중함을 관계의 기본적인 태도와 양식으로 여길 것이다. 점잖게 행동하고, 남에게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래서 부당한 대접을 받았을 때는 ‘이상하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어린이들의 이런 노력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 게 있다. 사회생활이란 결코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해서는 안 되고, 보고 배워서 일부러 그렇게 해야 한다. "

"나는 어린이의 품위를 지켜 주는 품위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이 앞에서만 그러면 연기가 들통나기 쉬우니까 평소에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고, 사려 깊은 말을 하고, 사회 예절을 지키는 사람, 세상이 혼란하고 떠들썩할 때일수록 더 많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마음만으로 되지 않으니 나도 보고 배우고 싶다. 좋은 친구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나 기웃거리는 요즘이다."

"어린이를 만드는 건 어린이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 안에는 즐거운 추억과 성취뿐 아니라 상처와 흉터도 들어간다.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어린이의 것이다. 남과 다른 점뿐 아니라 남과 비슷한 점도, 심지어 남과 똑같은 점도 어린이 고유의 것이다. 개성을 ‘고유성’으로 바꾸어 생각하면서 나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 순간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간다고 할 때, ‘다양하다’는 사실상 ‘무한하다’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다."

"어른들은 흔히 “애들을 위해서 말을 가린다”라고 하는데 어린이야말로 말조심을 한다. 존댓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을 파악하고 어휘를 고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다. 경험은 어른보다 적은데 책임은 어른보다 많이 져야 한다. 우리 어린이들이 어른들 보아 가며 말하느라 참 고생이 많다."

"반말-존댓말 관계에서는 반말을 하는 쪽이 ‘존댓말을 듣는다’라는 이유로 더 권위를 얻는다.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는 사람보다 그 말을 듣는 쪽이 더 중요한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존댓말 하는 사람의 의견은 자주 무시된다."

"나는 어린이들의 존댓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서로서로 존댓말을 쓰고 친한 사이에만 반말을 쓰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 전까지는 어린이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겠다고 다짐한다. 어린이가 표현한 것만 듣지 않고, 표현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겠다고. 어린이가 말에 담지 못하는 감정과 분위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어른이 되겠다고. "

"말을 놓는 게 친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은 철없는 어른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때의 기분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나 자신을 노인이 될 과도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어린이도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또 어린이가 청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는 사이에 늘 새로운 어린이가 온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는 늘 어린이가 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어린이는 어른을 보고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 어린이는 가만히 서서 키만 자라지 않는다. 어린이에게는 성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공공장소에서도 어린이는 마땅히 ‘한 명’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어린이라는 이유로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어린이도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쪽으로 어른들이 지혜를 모으는 게 옳다. 어린이는 그런 공간에서 배우며 자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 이유’를 말하는 것과 “애를 안 낳는 게 답이다” “이 나라는 말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만일 정말로 나라가 ‘망한다’면 그 일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까? 한반도가 한꺼번에 바다 밑으로 가라앉거나 온 국민이 똑같이 빈손으로 추방되어 남의 나라를 떠돌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약한 사람 순으로 희생되는 식일 것이다. 공기가 나빠지면 깨끗한 공기를 살 수 없는 사람들이 타격을 입는다. 병이 돌면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병에 노출된다. 기후 변화로 큰비가 이어지면 주거 상황이 나쁜 사람, 일을 멈출 수 없는 사람이 피해를 입는다. ‘망해라!’ 하는 저주가 분풀이는 되겠지만, 약자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미래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어린이와 양육자를 고립시킨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만든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약자를 배제하자는 결론으로 향하는 것이."

"사회가 여성에게 “아이를 낳아라” 하고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우리도 “아이를 낳지 말자”라고 받아치면 안 된다. 사회가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으니 주지 않겠다고, 벌주듯이 말하면 안 된다. 이 말은 곧 사회가 자격이 있으면 상으로 아이를 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린이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언제나 절망이 더 쉽다. 절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고, 무엇을 맡겨도 기꺼이 받아 준다. 희망은 그 반대다. 갖길 마음먹는 순간부터 요구하는 것이 많다. 바라는 게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고, 외면하면 안 된다고, 심지어 절망할 각오도 해야 한다고 우리를 혼낸다. 희망은 절망보다 가차 없다. 그래서 우리를 걷게 한다."

"우리에게 자녀가 있든 없든, 우리가 어린이와 친하든 어색하든, 세상에는 어린이가 ‘있다’. 절망의 말을 내뱉기 전에 어린이를 떠올려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다. 어린이를 감상하지 말라. 어린이는 어른을 즐겁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어른의 큰 오해다."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 있다. 나라의 앞날은 둘째치고 나라의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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