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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아부지 엄마를 뵈러 현충원에 다녀왔다. 올해는 I수녀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명절이라 안그래도 한번 들러야겠다 생각했지만 늘 혼자 찾았던 곳이라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이번만큼은 I수녀가 함께 가고 싶다고 해서 함께 찾아갔다. 동기 수녀랑 함께 가보는 것도 좋겠다 싶고, 산책 겸 외출 겸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고. 셔틀을 타고 현충원을 크게 한 바퀴 돌아서 들어가는데, 오늘은 명절이라 참배객이 참 많았다. 근데 막상 이곳은 오래된 묘역이라 참배객이 거의 없었다. 언제나 고즈넉한 곳. 역시나 오늘도 백세주는 뚜껑을 열지 않았다. 쓰레기를 버리러 돌아서자마자 처음보는 팻말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 이분들이 모셔졌다는 것도 몰랐다. 미안하고 감사한 일. I수녀랑 서서 기도하고 왔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7-18) 내 기도를 받으실 분은, 내 마음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기며 사순시기를 시작한다. 다른 이들과 내 기도를 나눌 필요도, 다른 이들의 기도에 귀 기울일 필요도 없다는 말이 아니라 내 기도가 허공만 맴돌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도 들으시는 한 분이 반드시 계시고, 내가 미처 몰라준 누군가의 마음도 반드시 보듬으시는 분이 계심을 기억하자는 것.
진료 마치고 조금 줄어든 약을 두 달치 받아서 기차 시간 전까지 너무 가보고 싶었던 곳에 들렀다. 얼마 전에 아트북카페로 재오픈한 page house. 예술 관련 도서관인데 오브제 등등 작품도 모아서 전시 및 판매를 하고 카페도 겸하는 곳. 대구 동부 중학교 부근. 우와 탄성하면서 내려간 바람에 입구에 있었던 지구본을 찍지 못한 게 아쉽구나. 그거 말고도 몇 개의 지구본이 더 있었는데... 책은 너무나 많았는데 함께 간 회화 전공자분 왈, 나한테 있는 책이 전부 여기 있어!라고 할 정도의 책. 한국말은 거의 없고 영어도 1/3정도 될라나. 내겐 오브제 구경이 더 신나는 일. 어느 한 군데 정성 가득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곳이었다. 가족사와 개인사와 수많은 삶..
대전 사는 분원 모임. 곧 소임 이동 기간이라 처음으로 다들 모였다. 길만 보이면 부지런히 걷는 수녀님들. 각자의 시간에 따라 머물고 떠나는 사람들이라 또 언제 어디서 만날지 모르는 우리들. 그래서 괜히 흑백으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천천히 주위를 걷다가 만나서 이야기하고, 또 헤어져 걷다가 또 다른 일행을 만나고. 열한 명이 이래저래 모이고 흩어지고 하면서 겨울 강가를 산책했다. 결국 어느 지점에서 다같이 만나 이제 그만 돌아가자며 걸어가는데 해저무는 시간이라 그런지 아기 참새들이 재밌고 피곤했을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조롱조롱 얹히닷 가지에 앉아 있었다. 우리도 언젠간 저렇게 고단하고 재밌었던 삶을 마무리하면서 날개를 접은 채 모여 앉겠지. 그때도 저 저무는 하늘처럼 아름답고 고요했..
내 소원 중 하나가 어쩌다 한 번씩 창가에서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책을 보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병원 와서 검사하며 조금 두려워하던 3일 말고는 매일 그렇게 보냈구나 싶다. 일어나기 싫을 때까지 창쪽을 향해 읽다읽다 눈이 아파 도저히 안되겠다 싶을 때 불 켜고 계속 읽었다. 때맞춰 좋은 책들이었고 조용했고 실수로 사게 된 음악도 좋고 좋았다. 올해는 힘든 일 생길 때마다 지금을 생각해야겠다. 시간 맞춰 뛰어가는 공동 기도와 공동 식사는 내 수도삶의 기본 중 기본이지만, 하느님이 새해 선물로 기도도 밥도 물러 놓고 창가에서 맘껏 책 읽는 시간 선물로 주셨네, 주셨어! 거의 열흘 만에 수녀원으로 돌아와 저녁미사를 나갔더니 진송 자매가 수녀님 보고 싶다며 눈길에도 저녁미사를 나와줬고, 무뚝뚝한 남자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