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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하루하루 부르심따라 (156)
깊이에의 강요
신부님 어머니 장례미사에 다녀왔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떠나보낸 사람의 마음 뿐이라 장례 미사를 가면 늘 남은 사람들을 걱정하게 되는데 오늘도 어머니의 장례 미사를 주례하는 사제의 마음을, 자신의 방에 한참 동안 두었던 어머니의 영정 사진을 제대 앞에 놓아야 하는 심정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게 속상해서 한참을 울었다. 엠마 어머니는 치매를 오래 앓으셨다. 멈춘듯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사랑하는 아들 신부도, 행동의 순서도, 언어까지도 천천히 잊혀갔지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았던 건 기도문이었다고 한다. 그 기도문은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 아니라, 어쩌면 어머니의 존재 자체가 아니었을까. 평생 수도 없이 말했던 무수한 단어들은 거의 모두 잊혔지만 끝내 남았던 기도문. 그리고 자신에 대한 기억은 모두 사라졌어도 자신..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반대하고 싶었다. 이 선택은 모으는 길이 아니라 가르는 길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곧 그만두었다. 이 방법을 택해도 가르는 길이 아니라 모으는 길로 가려고 노력할 사람들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눈에 옳다고 여겨지는 선택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믿는 길을 택했다. 오늘 복음(마르 9,5-6https://singthelord.tistory.com/m/3116)을 묵상하면서 더 분명해졌다. 하느님을 향한 길도 휠 수 있고, 방향을 틀면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매순간 내가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고, 나를 당신께로 부르시는 분의 사랑을 알고 의탁하는 것. 내 눈에 휜 길이라고 멈춰 선다면 나는 영..
별 키우기 문정희 나만의 별 하나를 키우고 싶다 밤마다 홀로 기대고 울 수 있는 별 내 가슴속 가장 깊은 벼랑에 매달아두고 싶다 사시사철 눈부시게 파득이게 하고 싶다 울지 마라, 바람 부는 날도 별이 떠 있으면 슬픔도 향기롭다 + 사랑으로 오신 아기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마태 2,9) 올해는 성탄을 기다리며 오래도록 ‘별’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그분이 오셨음을 알리기 위해 빛나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앞서 가며 사람들을 그분께로 이끌고, 그분이 있는 곳 위에 이르러서는 지체 없이 멈춘 별. 아기 예수 앞에 고요히 머물며, 우리 모두 홀로 빛나지 않고, 사람들과 나 자신 모두가 그분을 향하도록 나아가..
세미나를 왔고 오랜 만에 수녀님들과 우리 회의 특은에 대해, 세상과 수도생활에 대해 묵상하고 나눔도 했다. 첫시간에 우리는 모두 자신의 개인적인 성소를 떠올려야 했는데 나는 내가 꿈을 통해 비로소 성소를 깨달았던 때를 기억해냈다. 그때의 난, 밖에서 들려오는 여러 부르심에 흔들리긴 했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이 없으니 주위만 맴돌며 응답하지 못하고 헤매다가 연이어 꾼 꿈을 통해 ‘내가 원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후 수녀원에 들어왔다. 하느님의 뜻이 내 뜻과 같음을 발견했을 때 비로소 흔들림 없이 걸어갈 수 있었고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내 수도 여정에서 첫번째 서원을 하며 고른 성경 말씀은 ‘원의를 일으키시는 분도 실천케 하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필리 2,13 200..
매주 첫영성체 부모 교리 시간에 를 강의한다. 강의로는 처음이라 관련 자료들을 읽고 공부하고 정리해서 키노트 작업을 하는 것도 좀 벅찬 일인데 매주 강의를 해야한다는 건 더 부담스러운 일. 근데 보다 더 큰 문제는 아이들이 세 가정 뿐이라 엄마 세 명에게 강의를 한다는 것. 교황님 글이 무척 좋은 내용이긴 하지만 내용이 깊어서 엄마들이 직장 다니고 집안일도 하면서 여유 있게 번역문을 매주 읽는 것이 쉽지 않을테고(예비자 엄마도 있음), 강의 내용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재밌는 얘기일 리가 없으니 하는 나도 어렵지만 듣는 엄마들에게는 더 재미 없고 힘든 일일까봐(그래서 더 노력하긴 하지만) 매주가 고민의 연속이었다. 어쩌다 한 분이 빠지기라도 하면… 지난 주엔 다들 조금씩 늦으셔서 무안해하지 말라며 꺼낸 이..
올해 축일에도 이런 저런 선물들을 받았다. 작고 소소해서 소중한 것들도 있고 너무 커서 고맙지만 마음 무거운 것들도 있고 여하튼 그렇다. 봉투에 잘 담겨서 오는 현금들은 수녀원 생활비로 직행하고 꽃다발들도 성당 앞에 잘 모셔진다. 물건들은 내게 필요한 건 내게 오고 아닌 것은 수녀원 공동장에 들어간다. 내가 주로 많이 받는 것을 문화상품권인데 아직 나를 파악하지 못하셨는지… 양산(내가 양산이라니 ㅎㅎㅎ)을 두 개나 받았다. 하하하. 마지막으로 깜찍하고 정성 가득한 손편지들은 내 책상 위에 오래오래 머문다. 올해는 좀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좋다거나 신난다는 뜻은 아니고 기분이 좀 묘했다. 크로스 센튜리2. 내 수도명까지 각인된 볼펜이다. 주임신부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인데 여지껏 이곳저곳 성당을 옮겨..
이 계절의 끝에 만난 라일락의 날개. 피정 동안 산책하면서 좋아하던 나무들을 찾아갔다. 여러 목련 중에 하나의 목련, 여러 라일락 중에 하나의 라일락. 피정집 주위를 돌며 산책할 때 눈을 마주치곤 했던 라일락을 보러 갔더니 이렇게 투명한 날개를 단 씨앗 몇을 마지막까지 붙들어주고 있었다. 보라색 꽃들과 아찔하던 향기가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이 나무를 좋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에게도 그럴 수 있을까. 염려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도 그럴 수 있을까. 상대를 쉽고 가볍게 여기는 태도 앞에서 나는 여전해야할까. 라일락을 대하듯 그러지 못할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 이미 그러고 있어서일까.
신부님께. 제가 긴 글을 쓰려고 해요. 넓은 마음으로 잘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평소 신부님 강론을 좋아해 귀쫑긋해서 듣는 편인데, 오늘은 한 문장이 마음에 좀 남았어요. 그 얘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아마도 “여자가 가장 예뻐지는 때는 엄마가 되었을 때다.”라는 의미의 문장이었어요. 오늘이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인지도 알고 신부님의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모르지 않지만, 듣는 순간 염려가 되었어요. 염려와 더불어 그 말이 ‘엄마가 아닌 여자는 최고로 예뻐질 수 없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않으며, ‘최고로 예뻐지는 것이 사람의(=여자의) 최고 목표’란 의미도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좀 더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앞으로 신부님이 만나야할 사람들은 좀 더 달라진 세상을 살고 있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