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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부르심따라

마음을 쓴다는 것

하나 뿐인 마음 2022. 6. 9. 13:36


올해 축일에도 이런 저런 선물들을 받았다. 작고 소소해서 소중한 것들도 있고 너무 커서 고맙지만 마음 무거운 것들도 있고 여하튼 그렇다. 봉투에 잘 담겨서 오는 현금들은 수녀원 생활비로 직행하고 꽃다발들도 성당 앞에 잘 모셔진다. 물건들은 내게 필요한 건 내게 오고 아닌 것은 수녀원 공동장에 들어간다. 내가 주로 많이 받는 것을 문화상품권인데 아직 나를 파악하지 못하셨는지… 양산(내가 양산이라니 ㅎㅎㅎ)을 두 개나 받았다. 하하하. 마지막으로 깜찍하고 정성 가득한 손편지들은 내 책상 위에 오래오래 머문다.

올해는 좀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그래서 좋다거나 신난다는 뜻은 아니고 기분이 좀 묘했다. 크로스 센튜리2. 내 수도명까지 각인된 볼펜이다. 주임신부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인데 여지껏 이곳저곳 성당을 옮겨 일하면서 주임신부님으로부터 선물이라는 걸 받은 건 처음이지 싶다. 대부분은 식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축하가 끝나고 좀 더 마음 쓰시는 신부님은 필요한 거 있으면 사라고 하시고 사고 난 후 값을 치러주신다. 나도 그러려니 한다. 가장 좋았던 기억은 대전에 살 때. 그 신부님은 필요한 게 없다는 내 말에 결국 보좌 신부님한테 카드를 들려서 교보까지 가게 만들었는데, 이게 최고로 마음에 드는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며칠 전 이것.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도, 이것저것 메모하고 끄적끄적 뭔가를 쓰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놓치지 않고 저런 선물을 하신 것이다. 누구를 시키지도 않고 당신이 상대를 생각하고 선물을 고르고 주문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다. 맘편하게 쓰기엔 고가인 데다가 색깔마저 흰색이라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고 필요한 거 말하라고 하시면 샌들이라고 대답할 생각이어서 당황스럽기까지한 선물이었다. 당일은 낮술을 드시고 약간 기분이 좋아지셔서 경상도 남자처럼 “자, 이게 연필인지 볼펜인지 몰라.”하시며 주셨는데(오다 주웠다 버전으로) 기억을 못하시고 다음날 새벽에 또 챙겨주시겠다고 나를 부르셔서 두 번 놀라게 만드셨고, 오늘은 아깝다고 안 쓰고 그러지 말라면서 아는 척을 하셨다, 물론 사람들 없는 곳에서. 이런 내 얘기에 누군가가 그랬다, “명장의 명성이 괜히 얻어지는 게 아니네.” 사제들 사이에서 좋은 어른으로 기억되는 건 그분 ‘마음’과 ‘마음이 드러나는 행동’일 것이다.

올해는 이용수 할머니와 식사까지 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축일을 보냈다. 그러니 좀 더 잘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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