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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43)
깊이에의 강요
개인 소유에 대한 규칙서를 읽으면 자동으로 "답은 '없다' 입니다"라며 우스개 소리를 하던 수련소 시절이 생각난다. 입회하기 전에도 수도자는 가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하나도 없다니! 그런데 이 '없음'과 더불어 하나를 더 알게 되었으니 '공동 소유'라는 개념이다. 즉 성규에서 제시하는 가난의 이상은 다름 아닌 '공동 소유'이다. 수도원의 모든 것은 모든 이에게 공동 소유가 된다. 사부 베네딕도는 아빠스의 명령 없이는 누구라도 무엇을 주고 받지 못하며, 어떤 것도 개인 소유로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RB 33장 참조) 그 이유를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RB 33,4)라고 밝힌다. 더불어 "'모든 것은 모든 이에게 공동 소유가 되어야 하며', 누구..
45장과 46장은 잘못한 이들의 보속에 관한 규칙이다. "만일 누가 시편이나 응송이나 후렴이나 독서를 할 때 잘못하고서도, 당장 모든 이들 앞에서 겸손되이 보속하지 않거든 더 큰 벌에 처할 것이다."(RB 45,1) 베네딕도 성인은 실수나 잘못보다 보속하지 않으려는 것을 더 무겁게 보았는데, "이는 그가 소홀함으로 잘못한 것을 겸손으로써 고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B 45,2) 나는 종종 어릴 적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커다란 각도기를 떠올리곤 한다. 같은 30도를 재고 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그려 놓은 선들의 사이각은 나의 조그만 각도기로 잰 것보다 훨씬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각도라 해도 변의 길이가 길어지면 그 끝의 차이는 커다란 칠판보다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
성무일도의 시간을 알리는 신호를 듣거든 즉시 손에 있던 모든 것들을 그대로 두고 가장 빠르게 달려올 것이나, 신중하게 하여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RB 43,1-3) 살다보면 주어진 일에 너무 열심한 나머지, 하느님의 일보다 내 계획, 내 편의가 더 중요해지는 유혹의 순간이 수시로 온다. 이는 사랑의 척도이니, 그때마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규칙서의 이 부분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아무것도 하느님의 일보다 낫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수련소 시절, 글씨를 쓰다가도 그것이 성경 필사라 할지라도 공동 업무의 종이 울리면 마침표 하나만 남았더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을 종종 들었다. 슬며시 웃기도 하면서 들었지만 살면 살수록 이 ..
23장부터 30장까지는 잘못과 교정에 관한 규칙, 특히 장상과 공동체 입장에서의 노력에 관한 규칙들이다. 사실 이 규칙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의문을 많이 품게 하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이후 나오는 보속과 치유에 관한 규칙(43-46장)을 합치면 모두 12장으로 규칙서에서 꽤 큰 분량을 차지하고 있기에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부분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규칙들을 묵상하면서 의문을 넘고 넘다가 형제가 교정의 단계를 밟고 있을 때 나머지 공동체 형제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해야하는지에 가 닿았다. "만일 어떤 형제가 반항하거나 불순종하거나 교만하거나 불평하거나 혹은 성규의 어떤 점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거나 자기 장로들의 명령을 멸시하거든"(RB 23,1) 교정의 단계가 시작된다. 물론 교정..
수도자의 침방은 그 시대의 요구에 맞게 독방을 사용하던 때와 공동 침실을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베네딕도 성인이 수도생활을 하던 시대는 공동침실을 사용하던 시대였다. 하나의 공동 침실에 모여 각각의 침대에서 잔다. 공동 침실은 아무도 온전히 자신을 가리거나 숨을 수 없도록 함으로써 '이것만큼은 나만의 것'마저도 봉헌하게 만든다. 침구 역시 세상의 안락에 머물지 않도록 수도생활의 방식에 맞게 아빠스가 분배하는 대로 받았다. 수도승의 하루는 잠자는 시간마저도 하느님을 향해 있어, 등불은 아침까지 밝혀두어서 어둠에서 깨어나 실수하지 않도록 하며, 하느님의 일(시간 전례)을 위해 쉽게 일어날 준비를 한 채로(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다가, 신호가 나면 지체 없이 일어나서 하느님의 일에 서로 빨리 오도록 노력할 것..
미사를 드리고 내려와서 피정자들끼리 아침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에 다시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이미 아침 기도와 미사까지 끝낸 누군가가(아마도 신부님) 자전거를 타고 수도원을 오가는 게 창문 밖으로 얼핏 보인다. 내리막 방향일 때는 굳이 다리로 페달을 밟지 않아도 자전거 체인 소리가 경쾌하게 들리고 체인 감기는 속도만큼 형상도 순식간에 창문 프레임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오르막 방향일 때는 프레임에 들어온 후에 천천히 사라지며 소리에서도 끙끙 애쓰는 노력이 느껴진다. 기도 중이라 창밖을 내다볼 순 없지만 소리 만으로도 지금은 내리막길인지 오르막길인지 알 수 있다. 수련소 때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던 기억이 자꾸만 올라와 기도 시간에 분심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성당에 앉아 묵상을 하던 중에 자..
십인장의 자질을 적어보며, 나 역시 책임을 지며 살아갈 일이 있으므로 자질마다 묵상을 조금 보태어 본다. 평판이 좋고(1절) 하느님의 계명과 자기 아빠스의 명령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열 사람을 모든 점에서 돌보아야 하는 십인장은 신뢰가 기본이어야 한다. 아빠스는 물론이고 맡겨진 이들에게도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은 수도자들을 기본적으로 신뢰하기에 더 기대하고 더 섬세하고 높은 잣대를 가지고 바라본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의 잣대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보기를 바라는 이들의 기대가 무너지지 않도록, 희망하는 이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하느님 안에서 한껏 더 분투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신뢰가 과분하니 잣대도 감사하게 받아들이자. 생활이 거룩한(1절) 자칫하면 인간적..
고정된 시간에 바치는 시간전례의 탄생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하느님을 잊어버릴만하면 불러 모아 기도하도록 만들어진 성무일도. 나는 이 규칙서에서 시간전례에 관한 부분을 로 시작하는 것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흔히들 해가 떠야 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하느님의 시작은 어둠부터이고, 잎이 돋고 꽃이 피는 때도 좋지만 씨앗이 썩어 싹이 트는 어둠의 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초저녁부터 잠을 청해 캄캄하고 고요한 새벽 2시 즈음에 일어나 수도복을 입고 고요한 발걸음으로 성당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춘 수도자들을 상상해 본다. 로 봉인된 입술은 를 시작으로 완전한 침묵을 깨고 하느님께 입술을 열어달라는 간청으로 하루의 기도를 시작한다. 지금이야 성무일도가 읊고 노래하는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