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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RB 45,1 겸손되이 보속하지 않거든 본문
45장과 46장은 잘못한 이들의 보속에 관한 규칙이다. "만일 누가 시편이나 응송이나 후렴이나 독서를 할 때 잘못하고서도, 당장 모든 이들 앞에서 겸손되이 보속하지 않거든 더 큰 벌에 처할 것이다."(RB 45,1) 베네딕도 성인은 실수나 잘못보다 보속하지 않으려는 것을 더 무겁게 보았는데, "이는 그가 소홀함으로 잘못한 것을 겸손으로써 고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RB 45,2)
나는 종종 어릴 적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사용하시던 커다란 각도기를 떠올리곤 한다. 같은 30도를 재고 있는데 선생님이 칠판에 그려 놓은 선들의 사이각은 나의 조그만 각도기로 잰 것보다 훨씬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작은 각도라 해도 변의 길이가 길어지면 그 끝의 차이는 커다란 칠판보다 크게 벌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때부터 나는 '무언가의 시작을 볼 때 그 미약함이 가져올 창대함과 결코 분리해서 받아들여선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로 했다. 베네딕도 성인 역시 이토록 엄하게 말하는 것은 보속하기 어려워하는 당장의 생각이 점차 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커지고, 결국 불순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수도 없이 지켜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나는 이 장들을 읽으며 (공개적으로) 보속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하여 묵상했다. 특히 수도자들에겐 겸손이 수도생활의 기본 태도가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녹록치 않은 일이라 즉시 보속하는 것에 더뎌지고 무뎌진다. 그렇다면 보속하지 않으려는 태도에는 어떤 마음이 깃들어 있을까.
내탓(만)이 아니라는 마음이 있다. 이럴 수 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들도 있으니 보속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교만. 의도하지 않았다는 생각. 기도에 늦어 전체의 수렴을 방해했고 분심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기에 보속은 부당하다는 생각. 주일학교 아이들이 싸워서 물어보면 곧잘 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특히 때린 친구가 하는 말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면 꼭 해주는 말이 있다. "일부러 하지 않았다고 해도 누군가가 내게 와서 부딪히면 아픈 법이다, 그러니 생각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일부러 하지는 않았더라도 친구를 아프게 했으니 그 아픔에 대해 미안해할 줄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보속을 할만큼 큰 일은 아니라는 스스로의 판단이다. 제 자신에게 가장 너그러운 수도자는 그 첫걸음부터 다시 걸어야할지도 모르겠다.
여러 가지 묵상이 더 많았지만, 마음이 괴로워 정리하는 게 좀 힘들었다. 모르지도 않고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닌데 꺼내놓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 보속은 하느님 앞에서의 투명함이자 마음의 순결일텐데... 다시 또 일상의 자잘한 일에서부터 스스로 보속할 줄 아는 태도를 다짐해야겠다. 당장 어려워 미뤄둔 보속들이 쌓이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의 길이가 점점 더 길어져 돌이키기 어려운 간극이 되기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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