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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RB 8-20장 베네딕도의 공동 기도 본문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RB 8-20장 베네딕도의 공동 기도

하나 뿐인 마음 2020. 6. 12. 16:54

 

 

 

 

고정된 시간에 바치는 시간전례의 탄생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하느님을 잊어버릴만하면 불러 모아 기도하도록 만들어진 성무일도. 나는 이 규칙서에서 시간전례에 관한 부분을 <야간기도>로 시작하는 것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흔히들 해가 떠야 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하느님의 시작은 어둠부터이고, 잎이 돋고 꽃이 피는 때도 좋지만 씨앗이 썩어 싹이 트는 어둠의 시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초저녁부터 잠을 청해 캄캄하고 고요한 새벽 2시 즈음에 일어나 수도복을 입고 고요한 발걸음으로 성당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춘 수도자들을 상상해 본다. <끝기도>로 봉인된 입술은 <야간기도>를 시작으로 완전한 침묵을 깨고 하느님께 입술을 열어달라는 간청으로 하루의 기도를 시작한다. 지금이야 성무일도가 읊고 노래하는 형식이지만 그때는 글을 아는 형제가 촛불을 밝힌 성당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모두를 위해 시편을 낭독했으리라. 자신의 목소리에서 하느님을 찾고, 들리는 목소리에서 하느님을 찾았을 수도자들. 고요 속에 하느님을 찾는 시간. 1년에 한 번, 부활 대축일 밤미사 때 우리 역시 이 체험을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수도삶의 궤적이 깊을수록 시편 말씀은 반복해서 수도자의 영혼에 각인되었을 것이고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그 시편은 이미 수도자의 노래가 되어 있었을테니, 들리는 시편 말씀에 온전히 합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편은 시간전례를 바치는 수도자에게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나도 어느덧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누군가의 기도이고 하느님의 말씀이었지만 서서히 나의 기도이자 하느님을 향한 나의 삶 자체가 되어가는 것이 바로 시편이리라.

 

베네딕도 성인은 시편 자체가 몸에 배인, 시편과 일체가 된 수도승이었다. 그는 시간전례로 하루 일과를 구분했으니 마치 수레바퀴의 바큇살(spoke)을 시간전례로 배치함으로써 하루가 잘 돌아가도록 만든 셈이다. 계절이나 상황에 따라 시간전례의 시간이나 분량을 조절하는 유연성을 보여주지만 시편 분량만은 줄이지 않음으로 수도자들이 시편을 노래함에 있어 절대 게으르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기도에 대한 자세(나중에 다른 의미의 자세가 나오지만)는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책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라, 눈을 지켜라,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라, 성의는 어떻게 간수해라 등등 자세에 관한 규칙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만, "<영광송>을 노래할 때는 모든 이가 성삼위께 찬양과 존경을 드러내기 위해 즉시 자리에서 일어설 것이다."(RB 9,7)라고 한다. 한 20년 정도 살다보니 영광송을 위해 일어나는 것이 몸에 배었는데, 수련소 시절 겨우 자세를 잡았는데 시편이 끝날 때마다 벌떡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었다. 서원 후 성의를 받은 후에는 기도책을 들랴, 성의를 붙잡으랴, 다시 자세를 잡으랴 한동안 애먹었지만 지금은 대체로 자연스럽다. 이제는 공경심을 가지고 일어서되 내가 왜 일어서는지만 잊지 않아야 할 터. 일어서야 하는 때가 또 있는데 "넷째 응송에만 선창자가 <영광송>을 한다. 이것을 시작하면 모든 이들은 즉시 공경심을 가지고 일어설 것이다."(RB11,3), "아빠스는 모든 이들이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지고 서 있는 가운데 복음성서에서 뽑은 독서를 읽는다." (RB11,9) 성삼위에 대한 마찬가지의 존경과 경외심을 복음서에도 드러내야 한다. 

 

이제 마음에 와닿았던 몇몇 구절을 남겨보아야겠다. "주일에는 <야간기도>를 위해 좀 더 일찍 일어날 것이다."(RB 11,1) 주일엔 좀 더 쉬거나 좀 더 여유를 부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우리들에게 성인은 기도를 위하여 좀 더 일찍 일어나길 명한다. 그동안 본당은 주일이 바쁘고 고단하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성당에 적게 머무르면서도 얼마나 거리낌이 없었는지. 성인은 거룩하게 지내야하는 날이면 시간을 만들어서 기도해야 함을 알려준다. 시간을 내어서 하는 기도와 그저 주어진 시간에 하는 기도의 무게가 같은 리가 있겠는가. 

 

흐뭇하게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규칙도 있다. "평일의 성대한 <아침기도>는 이렇게 바칠 것이니, 즉 주일과 같이 시편 제66편을 후렴 없이 약간 느리게 외워 모든 이들이 후렴과 같이 외워야 하는 제50편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RB 13,1-2) 모두가 함께 시편 50편을 외우기 위해서 혹여라도 늦게 오는 수도자를 찾으러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반드시 올 것임을 희망하며 천천히 기도를 바친다는 것인데, 이 규칙 하나만 보더라도 성인이 수도승을 어떻게 배려하고 가르쳤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살면서 내가 자주 걸려 넘어지는 것 중 하나는 옳고 그름인데 옳지 않다 싶으면(이것도 결국 나의 기준이라...) 내 인내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기도의 시간에 제때에 오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제 시간에 기도를 시작하고 한결 같은 목소리와 빠르기로 너래하는 것이 ‘옳은’ 일이거늘, 그러나 성인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찾으러 가거나 교정을 요구하거나 싸늘한 눈빛을 보내거나 마음을 닫지 않고 자비를 간청하는 시편 68편을 느리게 외며 기다리는 공동체, 그들은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달라는 51편을 그 형제와 ‘함께’ 바치기 위해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아침기도>와 <저녁기도>의 마지막 순서로 장상은 모든 이들이 듣는 가운데 <주의 기도>를 반드시 외울 것이다. 이는 흔히 일어나는 마음의 가책 때문이니, 기도문 가운데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라는 언약을 바침으로써 모여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허물에서 자신들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이다."(RB 13,12-13)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에 관한 설명은 베네딕도 성인의 고유 부분인데, 성인은 기도가 수도자의 모든 것을 주관해야 함을 알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공동체 안에서 알게 모르게 주고 받았던 상처와 아픔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느님과 공동체 앞에서 '언약' 즉 '약속'하게 함으로써 수도자들이 용서의 삶을 살도록 했다. 그것도 하느님의 힘으로 할 수 있도록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힘을 빌렸다. 나는 아직도 가끔 베네딕도 성인이 사람들로부터 온갖 고초를 다 겪었음을 잊곤 하는데, 이런 부분들을 읽으면 그가 겪었던 고통과 쓰라림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찾고 발견했음을 알 것 같다. 그는 용서받는 삶의 중요성도 알았지만, 용서해야만 얻을 수 있는 자유와 평화도 알았으리라. 그리고 그 용서의 시작은 자비의 하느님으로부터 온다.

 

"만약 우리가 <아침기도>, <제1시기도>, <제3시기도>, <제6시기도>, <제9시기도>, <저녁기도>, <끝기도> 때에 우리 섬김의 의무를 완수한다면, 우리는 이 거룩한 일곱이라는 숫자를 채우게 될 것이다."(RB 16,2) 나는 제때에 시간경을 바치는 것을 '거룩한 섬김의 의무'를 완수하는 것이라는 표현에 감명을 받곤 한다. 내 생애 동안 완수해야할 '거룩한 섬김의 의무'.

 

"<끝기도>는 세 개의 시편들을 외움으로써 끝낼 것이며, 이 시편들은 후렴 없이 외울 것이다."(RB 17,9) 끝기도의 시편은 변함없이 늘 같은 시편을 외운다. 단조로울 수 있는 수도자의 하루를 가장 새롭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시간 전례인데, 매일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았더라도 하루의 마침은 한결같은 기도로 마무리한다. 한결 같은 마음으로 변치 않는 분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다. 나는 특히 끝기도의 응송 '주의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진실하신 주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우리를 구원하셨나이다'를 좋아한다. 그래서 주일이나 대축일이 되어 이 응송을 노래로 바칠 때를 기다리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19장은 시편을 외우는 태도에 관한 장이다. 성인은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며, '주님의 눈은 모든 곳에서 선인들과 악인들을 살펴보고 계심'을 우리는 믿는다. 그렇지만 특히 하느님의 일에 참례할 때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 사실을 믿을 것이다."(RB 19,1-2)라는 말로 시작한다. 성인이 생각하는 태도는 두려움으로(3절), 지혜롭게(4절), 천사들 앞에서(5절)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편을 외울 때는 우리의 마음이 우리 목소리와 조화되도록 할 것이다."(7절)Let us stand to sing the psalms in such a way that our minds are in harmony with our voices. 라고 말한다. 태도가 다름 아닌 마음과 목소리(시편)의 조화라니! 언뜻 진실하게 서로를 맞추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내게는 아무도 볼 수 없는 나의 마음을 시편에 어울리는 마음가짐으로 바꾸어 나가라는 섬세한 초대로 들렸다. 사람들 눈 앞에서는 태도로 내면을 가릴 수 있지만 하느님과 스스로에게는 가릴 수 없으니,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가장 진솔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리라. 나아가 그저 솔직한 마음이 아니라, 시편 기도에 맞게 마음마저 온전히 기도화하도록 성인은 부드럽게 우리를 이끈다. 이렇게 할 때 우리 마음이 못다한 부분은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실 것이니, 마이클 케이시 신부님은 "이렇게 시편을 노래하는 수도승은 시편 말씀에 감화되어 내면의 모습이 온전해집니다. 그는 하느님 말씀에 사로잡히고 그 말씀이 누룩처럼 그 수도승의 주관(主觀)에 스며들어 그의 생각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공동 시간전례에 관한 마지막 20장은 기도 때의 공경심에 대한 규칙인데, 주님이신 하느님께 '온갖 겸손과 순결한 경건심으로 간청"(2절)하되, '짧고 순수해야'(4절) 한다고 충고한다. 수도승이란 침묵의 덕을 닦기 위해 때로는 좋은 담화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수도승의 기도 역시 짧고 순수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성인의 지혜가 놀랍기만 하다. 그는 조금이라도 허영이나 자만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수도자의 성무일도는 나 자신의 성덕을 위해 바치는 개인 기도가 아니라,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과 하고 싶지만 시간을 바칠 수 없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 모두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세상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그만둘 수 없다.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내 자신을 바치는 시간이므로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다. 난 서원을 하면서 성무일도의 책임을 부여받았다. 세상을 위해 적어도 하루 네번, 하느님 대전에 무릎 꿇기로 서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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