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깊이에의 강요

RB 제7장 겸손에 대하여 본문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

RB 제7장 겸손에 대하여

하나 뿐인 마음 2020. 6. 11. 22:27

 

 

겸손의 단계를 시작하면서 성인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늘 눈앞에 두어 잠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특히 '늘'(semper)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는데, 그저 알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기억하는 노력을 하라는 뜻이리라.  나는 이 첫 단계를 묵상하면서 '하느님 면전'을 떠올렸다. 현존 속에 머문다는 것은 내 삶이 늘 하느님 면전에 있음을 알고 기억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느님 얼굴을 늘 내 눈 앞에 두는 것, 반갑고 기쁠 때도 있겠지만 어렵고 때론 괴로운 때도 분명 있으리라. 그러나 하느님 면전에서 떠나지 말 것.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은 적이 없으시니(이사 49,15 참조) 이는 곧 하느님 면전에서 '떠날 수 없음'을 기억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 옳고도 당연한 사실을 나는 얼마나 자주 잊고 사는지. 성호경을 그어야만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것처럼 사는 때는 또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 면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 세상 그 누가 엉뚱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베네딕도 성인은 인간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너무나 잘 알고 이해했다. 시편을 인용하면서 '하느님께서 우리 생각 가운데 늘 현존'하시고 천사들까지도 '매시간 보고 드리고 있다'고 말하며. 더 나아가 '육체의 욕망 중에서도 하느님이 우리와 늘 현존하신다는 것을 믿도록 하자'고 권고한다. 우리는 하느님 면전(현존)에서 떠날 수 없다. 스스로 눈을 감은 채 보이지 않으니 계시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여보는 것일 뿐.

 

겸손의 둘째 단계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뜻과 욕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의 모범이 바로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하신 주님이다. 사실 첫째 단계에서 이미 '네 뜻으로부터 돌아서라'고 하였으니, 비우고 포기한 자리에 그리스도의 힘으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는 단계이다. 하느님이 늘 계심을 아는 것이 첫째 겸손이요, 예수님의 도움으로 모든 일을 해나가는 것이 둘째 겸손이다. 

 

겸손의 셋째 단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순명으로써 장상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이제 겸손을 드러낼 상대가 '사람'이다. 이유도 두려움이나 모범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다. 아무리 장상이라 해도 겸손을 드러내는 일이 쉽지는 않음을 알았기에 베네딕도 성인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그분은 죽기까지 순종하셨다'고 덧붙였다. 온 힘을 다해, 끝까지 해야하는 일이다. 

 

겸손의 넷째 단계는, 순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는 당한 모욕까지도 의식적으로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며, 이를 견디어 내면서 싫증을 내거나 물러가지 않는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결코 쉽지 않다고, 어렵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쉬운 일이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다만 수차례에 걸쳐 이 길에 들어선 수도승들이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반복해서 알려준다. "네 마음을 굳게 가지고 주님을 견디어 내라.' '충실한 자는 비위에 거슬리는 모든 것까지도 주님을 위해 참아야 한다.'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가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시련을 이겨냅니다.' 성인은 어려움 역시 주님으로 받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당신이 우리를 불로 단련시키셨으니') 방법도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이다(주님의 계명들을 인내로써 채워...). 성인은 이 모든 것,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나 모욕 뿐만 아니라 그분을 말미암아 모든 것을 다 이겨낼 수 있음을 이미 다 겪어낸 분이었다. 

 

겸손의 다섯째 단계는,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악한 생각이나 남모르게 범한 죄악들을 겸손된 고백을 통하여 아빠스에게 숨기지 않는 것이다. 즉 의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성인은 해결(극복, 식별, 대적 등)보다는 고백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역시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빛이 내 안에 들어오도록 문을 여는 단계이다. 당장 악한 생각들을 몰아내거나 죄짓는 행위를 단박에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그리 생각했고 그리 행하기도 했음을 '내가' 말하는 것이다. 이는 좋은 것, 완성된 것, 훌륭한 것은 비록 아닐지라도 꾸미거나 다듬을 틈도 없이 있는 그대로 주님께 열어보이는 것이고 바쳐드리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마저도 속일 수 있는지라 먼저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 보아야 하고, 자신의 비참함을 대면해야 하고, 이런 나조차 받아 안으시는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이 고백 역시, 내 힘으로 하지 않겠다는 겸손이다. 

 

겸손의 여섯째 단계는, 수도승이 온갖 비천한 것이나 가장 나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더 이상을 바라지 않는 '거룩한 무관심indifference'의 상태이며, 더 이상을 바라는 대신 "늘 당신과 함께 있겠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겸손의 일곱째 단계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가장 못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말로써 드러낼 뿐 아니라 마음 깊숙한 정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적격함을 깊이 인식하여 여섯째 단계를 관계 속에서도 실천하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나 홀로 있을 때는 내 눈 앞에 하느님만 계시니 겸손이 한없이 어렵지만은 않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실천하기란 얼마나 곤혹스러운가. 베네딕도 성인은 이 단계를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나 자신을 모두 빼앗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하고 묻는다. 이에 대한 수도승들의 대답은 "당신이 나를 낮추셨기에 내가 당신의 계명을 배우게 된 것은 내게 좋은 일이었나이다."가 될 것이다. 주님, 이 시편을 저희 기도로 받아주소서. 

 

겸손의 여덟째 단계는, 수도승이 수도원의 공동 규칙이나 장상들의 모범이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독자성, 고유성에 대한 포기이다. 분량으로는 두 줄 뿐이지만 엄연한 하나의 단계로, 수도회 차원의 일이나 부여 받은 소임의 기본 임무 등은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개인의 독자성, 개별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지워나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겸손인가. 주님, 제게는 다른 무엇보다 이 단계가 가장 가혹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 뜻을 하나씩 지워나갈 때 제 이름은 조금씩 희미해져 사라지고 '수도자'라는 이름만 비로소 남게 되겠지요.

 

겸손의 아홉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함에 혀를 억제하고, 침묵의 정신을 가지고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말도 권력의 큰 표상인 세상이라 제때에 제대로 말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가. 억지로라도 침묵하고 있는 지금, 많은 말들을 소리로 내보내기 전에 곰곰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다. 글을 다듬듯 말을 다듬다 보면 좋은 말은 새어나가지 않아 내 안에서 기도로 무르익고 나쁜 말은 새어나가지 않아 내 안에서 낙엽처럼 쌓여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겸손의 열째 단계는, 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웃음의 절제를 왜 이토록 자주 언급할까 싶었던 적이 있었다. 살다보니 나약한 인간이 무엇을 웃음으로 지우고, 바꾸고, 드러내는지를 아셨나보다 싶다. 솔직한 생각을 드러내는 데는 온화한 표정만으로도 충분하다. 

 

겸손의 열한째 단계는, 수도승이 말할 때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목소리에 있어서는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베네딕도 성인은 수도승의 태도 중에서 말하는 태도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12개의 단계 중 세 번에 걸쳐 반복한다. 나는 이 단계를 읽을 때마다 수도자의 시편창을 생각한다. 성무일도 때는 물론이고 어쩌다 화답송 시편을 노래하게 될 때 특히 떠올리게 되는데, 수도승들의 매일매일은 찬미하는 삶이니 벅찬 감사도 깊은 슬픔도, 분노와 간절함도 잘 가다듬어 온화한 표정으로, 큰 웃음 없이, 겸손하고 정중하게, 간결하고 이치에 맞게, 적당하게 절제된 목소리로 기도하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 얼굴 근육을 많이 움직여 웃거나 소리를 내어 크게 웃으면서 시편을 동시에 읊을 수는 없다.

 

겸손의 열두째 단계는, 수도승이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항상 드러내는 것이다. 마음 속 생각을 태도로 드러내고 드러난 태도를 성찰하며 다시 마음 속 생각을 가다듬는다. 생각과 태도가, 육체와 영혼이(9절) 동일할 때 사다리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베네딕도 성인에 대한 경이감이 일어난다.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적 겸손이 더 다져져야 함은 물론이겠다. 

 

이사악 교부는 "겸손은 하느님의 옷이다"고 말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