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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하빌리스. 기대보다 훨씬 좋았다. 작가가 범죄(의 시작)의 소재로 삼은 것은 살인, 도둑질이 아니라 비겁한 책임 전가, 생각 없는 불법 주차, 주행 중 쓰레기 무단 투기 등 사소하게 교통 법규를 '어기는' 행위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쉽게 다른 사람을 얕잡아보는 등의 결코 사소하지 않은 비열한 태도나 이기적 행동 등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매우 치밀하고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되갚아 주는 반전도 꽤나 놀랍다. 올해 안에 몇 권 더 읽어봐야지.
백수린 장편. 문학동네.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이 문장을 읽은 뒤로는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문장이 자막처럼 흘렀다. 정말,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는 걸까. 살아갈수록 뉴스를 읽다가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을 듣다가도 사람이 어찌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무너지는가 싶을 때가 많지만 그래도 이 모든 폐허 같은 비참함 속에서 어떤 선함이, 어떤 순수함이, 어떤 곧음이 혹은 어떤 나약함이 끝내 버티고 있어서 다시 빛을 끌어들인다. 이 소설 역시 그런 힘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우리도 빛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래서 눈부시다. p.106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
히가시노 게이고.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진심을 깨닫는 일은 본인 스스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미처 전하지 못한, 차마 말하지 못한, 애써 감춘… 속마음과 진실을 다른 이에게 옮겨 심어주는(순전 내 생각) 신비로운 녹나무는, 그래서 더욱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절실할까. 오랫동안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고, 치부였던 것이 따뜻한 이해의 시작점이 되고, 밖에서 찾던 것이 자신 안에 이미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녹나무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서이기도 했지만 결국 끝까지 믿어보려 하고, 사랑을 쉽게 저버리지 않고, 피상적인 것만으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 나에게 기념은 마치 기도 같았고 예념은 기도의 지향, 수념은 은총 같았다. 젊은 세대 레이토..
김희경. 동아시아. 김희경 작가님의 책은 세번째인데 모두 좋았다. 이번 책은 나이듦, 존엄한 죽음, 자존심과 자존감, 홀로 머물되 함께 살아갈 줄 아는 것… 많은 질문을 던지고 돌아보게 했다. 비혼 여성의 삶이라기 보다는, 기존의 강요된 결속 방식을 허물고 새롭게 시작하는 인간의 '진화' 이야기 같았다고나 할까. 수도자가 되기 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수련 기간 동안 많이 들었었다. 내가 서원을 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것은 신앙, 기도... 이런 것만은 아니었던 것. 기존의 삶의 질서를 포기하고 수녀원에 입회해서 새로운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했던 시간들, 함께 살 줄 알게 된 후에 다시 홀로 서야 하는 서원의 삶, 나를 지우는 것이 공동체 삶이 아니라 하나의 모자이크 작업을..
박경리 대하 소설. 마로니에북스. 드디어 다 읽었다. 사람에겐 다른 사람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걸 내내 생각했다. 선악시비를 가리는 것도 부질없다 싶고, 안타깝지 않은 인생이 없었다. 관수 형님이 제일 매력적인 인물이었어."강한 놈도 약한 놈도 없어질 때 끝이 나겠지. 지금 당장에는 왜놈이 강한 놈이고 조선은 약한 놈이다." 석이는 어두운 땅을 내려다본다. "옛날 같았이믄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기고, 오늘 같이 허간가 하는 그 늙은이한테 무릎 끓는 따위의 병신 짓도 아마 안 했을 기다. 우짜믄 니보다 내 편에서 조가 놈 목통을 졸라서 직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런 것들은 다 밥풀이다." “…… " “니는 나보다 나이사 어리지마는 배운 것이 많고 책도 많이 읽었고, 그만큼 생각는 ..
김지승. 난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일기는 일기를 쓰듯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수련소 시절 손바닥만한 노트에 빼곡하게 일기를 썼었다. 성과 속이 맹렬하게 섞여서 휘몰아치던 시절의 내 일기는 끊임 없이 빈틈을 메워가는 글쓰기였고, 첫서원을 한 후 수녀원 소각장에서 남김 없이 태워졌다. 장렬한 전사 혹은 속죄의 번제. 가끔 그때의 내가 그립다. 서원을 했으니 모조리 태워서 하늘로 올려보내고 싶을 만큼, 다시 없을 솔직했던 나의 일기. 그 시절 나의 일기는 정말 '짐승 일기'였을지도... 이 일기는 혼자만의 조용한 짬이 날 때 조금씩 읽었다. 병을, 고통을 통과하며 쓴 일기는 투명하고 감출 게 없다. 작가와 견줄 만큼의 아픔은 아니었지만, 아플 때마다 이 책은 내게 말없는..
홍한별. 위고. 코로나에 걸렸던 동안엔 집중이 도저히 안 되어서 글을 한 줄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낫고 난 후의 첫 책이다. 집중이 떨어져서 책을 잘 읽지 못하게 될까봐 앓는 동안 잠시 두려웠었는데 정말로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언어를 조금씩 놓게 될까봐 코로나 후 다시 읽는 첫 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사전’에 관한 책을 골랐고, 캠프 가서 아이들이 물놀이하고 게임하는 동안 어떻게든 짬짬이 읽었다. 그리고 짬짬이 나를,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잃어가는 언어와 가졌다 여겼던 언어, 나만 안다고 안심했던 가면 안의 민낯과 차곡차곡 노력해서 얻고 싶었던 멋진 가면… 을 낱낱이 가려보고 싶기도 했지만 괜히 나 자신이 애잔해서, 책을 덮은 후 뛰노는 아이들을 한참 흐뭇하게 바라봤다. 부족한 줄 ..
나타샤 패런트 글. 리디아 코리 그림. 김지은 옮김. 사계절. 거울과 마주할 준비를 할 것! "이야기를 읽는 공주. 나는 그런 공주가 되겠어. 아니, 그냥 이야기를 읽는 공주가 아니라, 이야기를 모으고,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이야기를 말하는 공주가 될 거야. 나는 이야기 공주가 될 거야." 모든 이야기가 좋았지만 특히 가 제일 좋았다.p.101 ~ p.102 "그리젤 왕비는 엘렌이 약속을 어겼다고 나무라지 않았다. 그 리고 반드시 일어날 거라고 믿고 있는 어떤 일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p.112 ""분명히 안 좋은 결말로 끝날 거야." 왕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러나 왕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p.115 "그리젤 왕비는 엘렌에 게 바느질을 가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