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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녹나무의 파수꾼 본문
히가시노 게이고.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진심을 깨닫는 일은 본인 스스로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미처 전하지 못한, 차마 말하지 못한, 애써 감춘… 속마음과 진실을 다른 이에게 옮겨 심어주는(순전 내 생각) 신비로운 녹나무는, 그래서 더욱 우리 인간들에게 얼마나 절실할까. 오랫동안 꽁꽁 얼었던 마음이 녹고, 치부였던 것이 따뜻한 이해의 시작점이 되고, 밖에서 찾던 것이 자신 안에 이미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녹나무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서이기도 했지만 결국 끝까지 믿어보려 하고, 사랑을 쉽게 저버리지 않고, 피상적인 것만으로 속단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 나에게 기념은 마치 기도 같았고 예념은 기도의 지향, 수념은 은총 같았다.
젊은 세대 레이토와 노년층인 치우네씨가 주고 받는 대화도 무척 인상 깊었는데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세대 간의 차이가 이렇게 통할 수도 있구나 싶어 두 사람의 투닥거리는 대화가 내게는 참 따듯했다.
그러고보니 내가 그렇게 망설이고 또 거부하던 입회를 결정했던 건 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수도 삶에 대한 나의 갈망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성소의 씨앗으로 옮겨 심어졌고 새롭게 자라나는 것처럼, 녹나무가 옮겨 심어준 진심은 수념자 안에서 다시 자란다. 높이, 곧게, 튼튼하게, 그리고 깊게.
p.547
"“레이토는 이해를 못하겠지요. 젊은 레이토는 기억해두고픈 것들, 소중한 추억들, 그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흘러내리듯이 사라져가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요? 친하게 지내던 이들의 얼굴마저 차례차례 잊어버립니다. 언젠가 분명 레이토도 잊어버리겠지요. 그뿐만이 아니라잊어버렸다는 자각마저 없어져요. 그게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레이토가 알겠어요?˝
˝네,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과연 어떤 세계인지, 치후네 씨도 아직은 알지 못하잖아요. 잊어버렸다는 자각도 없다면 그곳은 절망의 세계 같은 게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예요. 데이터가 차례차례 삭제된다면 새로운 데이터를 자꾸자꾸 입력하면 되잖아요. 내일의 치후네씨는 오늘의 치후네 씨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뭐, 그래도 좋잖아요? 나는 받아들입니다. 내일의 치후네 씨를 받아들일 거예요.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p.549
"˝고마워요. 하지만 녹나무의 힘은 필요 없어요. 방금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오는 게 있다는 걸.˝
치후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여윈 손을 레이토는 두 손으로 감쌌다. 치후네의 마음이, 염원이 전해져오는 듯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