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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짐승일기 본문

雜食性 人間

짐승일기

하나 뿐인 마음 2023. 7. 27. 20:55

김지승. 난다.
 
나는 일기를 쓰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이렇게 누군가의 일기는 일기를 쓰듯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수련소 시절 손바닥만한 노트에 빼곡하게 일기를 썼었다. 성과 속이 맹렬하게 섞여서 휘몰아치던 시절의 내 일기는 끊임 없이 빈틈을 메워가는 글쓰기였고, 첫서원을 한 후 수녀원 소각장에서 남김 없이 태워졌다. 장렬한 전사 혹은 속죄의 번제. 가끔 그때의 내가 그립다. 서원을 했으니 모조리 태워서 하늘로 올려보내고 싶을 만큼, 다시 없을 솔직했던 나의 일기. 그 시절 나의 일기는 정말 '짐승 일기'였을지도...
 
이 일기는 혼자만의 조용한 짬이 날 때 조금씩 읽었다. 병을, 고통을 통과하며 쓴 일기는 투명하고 감출 게 없다. 작가와 견줄 만큼의 아픔은 아니었지만, 아플 때마다 이 책은 내게 말없는 응원을 보내줬다. 
 
작가의 친구처럼 나도 '쓰레기가 쓰레기가 아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말'이 참 좋았다.  


p.58
"작정하고 좀 빼내야 할 울음이 있다."

p.62
"수정체가 대상을 똑똑하게 볼 수 있도록 초점을 조절하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하니까요."

p.76
"아득바득과 아등바등 사이에서 일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들에게 아프지 않아서 할 수 있는 그 말들이 다 칼이 된다는 걸 몰랐던 자신에게 놀란다."

p.76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란 말을 끝으로 소원해지는 건 어떤 부정적 영향도 받지 않겠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겨우 팔을 흔드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몰랐다."

p.77
"어떤 시간은 소수의 사람들과만 건널 수 있으며 당신 역시 누군가의 소수로서 언젠가 힘을 내야 한다는 걸 모를 수 없게 되어서, 새 지도와 언어를 감사히 받아 들고 소수의 힘으로 당신은 괜찮을 것이다. 오늘도 관계는 관계의 선택을 할 뿐이다."

p.77
"걱정 어린 안부와 가벼운 호기심의 차이도,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과 ‘도움이 되는 나’에 취해 힘든 일에만 반응하는 이들의 차이도 더없이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아픈 이의 감정적 반응은 대게 “아파서”로 해석되므로…"

p.83
"바쁘면 타인의 시선을 깊이 받지 못하고, 몸 기울여야 들리는 말들을 기억하지 못하며, 중요한 감각을 놓치기 일쑤다. 자기 시간과 장소를 쓰지 않고 관계 맺는 방법을, 사랑하는 방법을 나는 알지 못한다."

p.96
"손해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한동안 어떤 이야기도 가질 수 없었다. 지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나서도, 더는 속지 않겠다고 마음먹고도 마찬가지였다. 쓰기는 그런 마음의 단념으로부터 시작되는 건가, 여러 번 생각했다."

p.107
"겨울에는 잠시 잠깐의 온기가 이상하게 서러워서 아예 냉기를 곁에 두는 마음도 있을 것이다."

p.108
"나는 내 방향으로 움직였을 뿐인데 그 결과 누군가와는 멀어지고 누군가와는 가까워진다. 너도 그랬을 것이다."

p.123
"아까, 쓰레기가 쓰레기가 아니었던 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말 좋더라. H가 내 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면서 말했다. 나는 숨이 차서 아무 말도 못했다."

p.162
"예민한 기질의 사람들은 감각한 대부분을 감각 못한 척하는 데에 능하다. 그걸 그냥 안다고 해야 할지 느낀다고 해야 할지 감지한다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p.163
"어떻게 하면 우리가 고립 없이 솔직해질 수 있을까…"

p.175
"우리는, 나와 너는 믿고 싶은 것 안에서 오래 각자를 지켜왔다고도 믿고 싶다. 더 많은 ‘믿고 싶은 것’이 필요하다. 우리 곁을 떠난 반려동물들이 훗날 하늘문 앞으로 우리를 마중 나온다거나, 입증할 수 없는 얼굴도 그들은 모두 알아볼 수 있다거나 하는."

p.276
"우리는 우리의 고통도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주는 고통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점이 늘 두렵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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