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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아무튼, 사전 본문
홍한별. 위고.
코로나에 걸렸던 동안엔 집중이 도저히 안 되어서 글을 한 줄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낫고 난 후의 첫 책이다. 집중이 떨어져서 책을 잘 읽지 못하게 될까봐 앓는 동안 잠시 두려웠었는데 정말로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언어를 조금씩 놓게 될까봐 코로나 후 다시 읽는 첫 책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서 ‘사전’에 관한 책을 골랐고, 캠프 가서 아이들이 물놀이하고 게임하는 동안 어떻게든 짬짬이 읽었다. 그리고 짬짬이 나를, 나의 아버지를 생각했다.
잃어가는 언어와 가졌다 여겼던 언어, 나만 안다고 안심했던 가면 안의 민낯과 차곡차곡 노력해서 얻고 싶었던 멋진 가면… 을 낱낱이 가려보고 싶기도 했지만 괜히 나 자신이 애잔해서, 책을 덮은 후 뛰노는 아이들을 한참 흐뭇하게 바라봤다. 부족한 줄 알면서도 잘 살고 싶은 것처럼 허영 안에도 진심이 있는 법이야.
p.57
"논리와 기억과 언어를 잃어가던 아버지는 정말 엉뚱하게도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도였는데, 사도들의 복음을 처음 언어로 기록할 때 쓰인 언어인 코이네 그리스어를 배워서 최초의 언어로, 번역으로 훼손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성경을 읽고 싶다고 했다. 원래의 의미, 태초의 의미를 찾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는 기묘하게 생긴 그리스어 알파벳을 노트에 옮겨 적고 날마다 외웠다. 언어를 잃어버리는 병에 걸린 아버지는 날마다 단어를, 생각을 놓치고 있으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고 했다."
p.153 ~ p.154
"내가 제아무리 열심히 단어를 모으고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챙겨 보아야, 내가 잃어버리고 놓치는 단어의 수는 하루하루 점점 늘어난다. 내 사전은 점 점 더 얇아지다가, 어느 날에는 수명을 다할 것이다. 각 단어에 얽힌 나의 기억, 경험, 감정, 느낌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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