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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제목 때문인지 마지막 4부를 읽는 동안 ‘잃음’을 자꾸 떠올렸다. 세월이 흐르면 잃을 수밖에 없는 것들, 떠나기 위해서는 잃어야만 하는 것들, 내려 놓는 것도 아니고 나눠주는 것도 아닌 잃음. 모셔놓는 것도 아닌, 더 이상 내것이 아니도록, 나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조차 없도록, 다시 찾을 도리가 영영 없도록 잃는 것. 이 나폴리 4부작을 읽기 전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를 읽었다. 두 여성의 대하소설을 연달아 읽고, 세상을 대하는 또 다른 시선을 배운다. 이 두 작가가 전해주는 영웅 없이 주인공들로 가득한 세상, 가감 없이 솔직한 인간들의 민낯을 받아들이는 용기, 앞면만 보이는 바른 세상 말고 앞뒤 모두 둘러본 후 만나는 진짜 세상…
캉탱 쥐티옹 글, 그림. 오승일 옮김. 바람북스. 내가 만난 캉탱 쥐티옹의 두 번째 책. ‘코클리코 요양원’에서 일어나는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노인들과 간호사의 이야기이다. 마지막 시간을 생전 알지 못했던 사람들과 낯선 장소에서 보내야 하는 것, 정리하고 돌아보고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마저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이 아닌 낯선 이들과 보내야 하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대신할 수 없는 것과 대신해도 되는 것.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반비. 새로이 해석되고 새로이 쓰여야만 하는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리베카 솔닛의 손을 거치길 바라고 또 바란다. p.21 "여러분이 아는 이야기에서는 공주가 백 년 동안 잠을 잤고 공주를 구하러 온 왕자들이 서쪽 탑으로 올라가 공주를 잠에서 깨우고 공주와 결혼해서 주르의 다음 왕이 되려고들 했다고 들었을 거야.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냐." p.28 ~ p.29 "마야는 아주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서 진짜 잘 그리게 됐어. 무언가를 아주 아주 잘하게 되면 마치 마법이나 다를 바 없게 돼. (마법은 그냥 일어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보통은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이루어지지. 무언가를 아주 아주 오래 갈고 닦으면 무척 쉬워 보이니까, 사람들이 '마법 같..
존 버거 글. 셀축 데미렐 그림. 신해경 옮김. 열화당. 를 읽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책을 먼저 읽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경험마저도 내겐 ‘시간’의 경험 같았다. 내가 뜻한대로 흐르진 않지만 시간은 자신의 순서대로 흐르고, 오고 가는 것들을 맞이하고 보내며 나도 시간 곁에서-온전히 안도 아니고 온잔히 밖도 아닌 곳에서- 시간의 주인이신 분께로 다가간다. p.40 "오래 품은 두려움은 의심이 된다." p.54 "어쨌든 세상에는 시간, 또는 특정한 시간을 거역하는 때들이 있다." p.7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시간이 없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쫓기며, 각자의 삶을 쫓는다."
안젤름 그륀. 김선태 옮김. 성서와함께 몰라서 못하나 싶어서 시큰둥하게 시작했지만 읽어 본(20년 전에 ㅎㅎㅎ) 책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하게 읽고 싶었고, 뒤로 갈수록 이 책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모르지도 않았지만 제대로 알았다고도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 잘 대하기’. 이제 동생 수녀님한테 넘겨줘야지. p.20 "과거에 돌보지 못했던 공격성은 자신을 향한다. 자기처벌은 종종 우울증이나 소화 장애, 두통, 배통(背痛) 등의 정신과 신체상의 증세로 나타난다." p.20 "돌보지 않은 채 방치해 둔 상처는 계속 옮겨가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p.23 "아이를 때리는 엄격한 교육만이 아이에게 공격성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쉬기 위하여 아이가 항상 제멋..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출신상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일란 파페가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 이스라엘의 원죄 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이스라엘의 건국 전후로 벌어진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학살과 추방에 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 책들 중 하나. 나치 폭압으로 뼈아픈 시련을 겪은 유대인들이 저지른 '종족 청소'에 대한 유대인의 고백이자 고발이다. 역사적 전체의 흐름보다는 1948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청소의 참혹한 현실을 조목조목 알려준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너무 안타깝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2.28기념 도서관까지 가서 빌렸는데 읽는 것이 솔직히 쉽지 않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내내 장소와 날짜, 숫자만 바뀌고 파괴, 유린, 학살, 강간, ..
정세랑 장편소설. 문학동네. 마침표까지도 나무랄 데가 없는 이야기. 역시 정세랑. 흥미진진하고 너무 재미진데(사투리 쓰고 싶어서 ㅎㅎㅎ) 치밀하고 따뜻한, 게다가 정중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가 서둘러 끝나버리면 나는 어쩌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계절마다 경주에 가 다음 이야기를 건져오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읽고 나서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제발요!!! 밑줄 그어 남긴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나는 정세랑 작가의 힘이 바로 이런 문장들이라 여긴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 잘 드러나지 않아도 소설 전체를 받치는 힘이 이런 문장에서 나오고 나는 또 그의 책에서 이런 문장을 보물 찾듯 발견하는 게 너무 좋다. p.33 "밤새 갑판을 살폈어야 할 불침번은 잔잔한 파도소리에 그만 잠들어버렸노라고 무릎을 꿇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