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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자기 자신 잘 대하기 본문

雜食性 人間

자기 자신 잘 대하기

하나 뿐인 마음 2023. 11. 24. 14:43

안젤름 그륀. 김선태 옮김. 성서와함께

몰라서 못하나 싶어서 시큰둥하게 시작했지만 읽어 본(20년 전에 ㅎㅎㅎ) 책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하게 읽고 싶었고, 뒤로 갈수록 이 책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모르지도 않았지만 제대로 알았다고도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 잘 대하기’. 이제 동생 수녀님한테 넘겨줘야지.


p.20
"과거에 돌보지 못했던 공격성은 자신을 향한다. 자기처벌은 종종 우울증이나 소화 장애, 두통, 배통(背痛) 등의 정신과 신체상의 증세로 나타난다."

p.20
"돌보지 않은 채 방치해 둔 상처는 계속 옮겨가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p.23
"아이를 때리는 엄격한 교육만이 아이에게 공격성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쉬기 위하여 아이가 항상 제멋대로 하는 것을 내버려둠으로써 아이가 자신이 부모에게 중요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느낀다면, 그러한 분별없는 교육도 공격성을 심어준다."

p.23
"육체적 처벌만이 아니라 그 정반대인 극단적 방치도 아이의 공격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이는 부모가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신을 놔두는 것을 자신들의 공격적 행동에 대한 부모의 동의로 이해한다."

p.26
"성을 적대시하는 성향은 공격성을 증가시킬 위험이 있다. 성을 엄격하게 대하는 태도 자체가 곧 일종의 공격성이다. 공격성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공격성은 억압을 받으면, 오히려 빗나간 양심주의로 돌변한다."

p.26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자신에게 공격적이고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대하도록 이끈다."

p.27
"억압된 욕망의 가장 나쁜 결과는 양심에 숨겨진 잔인함이다. 아이한테서 공격성을 폭력으로 몰아낼 경우 억제된 공격성은 초자아로, 곧 엄격한 양심으로 빗나가게 된다. “지나치게 엄격한 양심에 숨겨진 잔인성은 공격성의 가장 위험한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잔인성이 무의식에 머물러 있을 경우, 외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잔인성은 항상 좋은 목적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잔인한 방법을 합법화한다. 따라서 이 잔인성은 실현될 수 없는 힘의 요구들이 뿌리를 내리고 삶에 대한 적대감이 지배하는 보루가 된다.”(푸러)"

p.28 ~ p.29
"관대하고 인내하려는 사람은 “불충분한 것, 나쁜 것, 약점이 많은 것, 심지어 악한 것도 어느 정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계속 생길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것을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편협한 사람이다. 실수를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틀림없이 엄격한 사람이다.”"

p.49
"자기 자신을 깊이 깨닫고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하여 영혼의 내면에 이르는 수고스런 길을 겁내는 사람은 참된 삶에서 멀어진다. 자기 자신에 이르는 통로를 찾지 못하고, 생명과 사랑에 이르는 길도 찾지 못한다."

p.64 ~ p.65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려 했다고 좋게만 생각한다. 사람들은 기도와 포기로 내적인 길에 더 정진하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것이 유익하다고 여기지만, 무조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자신의 좋은 의지로 자신의 현실을 가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통해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다고 믿으면, 자신이 모든 것을 장악하려고 하지 않고, 우리 안에서 떠오르는 모든 것을 참으로 하느님께 내맡기게 된다."

p.65
"경건한 신심에는 항상 우리의 능동성이 필요하다. 다만 그 능동성이 바르게 설정되어야 한다. 능동성은, 우리가 모든 생각과 느낌, 걱정과 욕망, 불안과 갈망 등을 주의 깊게 감지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내어맡기고, 하느님께서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려는 말씀 곧 그분께서 우리를 어떤 모습으로 꾸미고 싶어 하시는지에 대해 그분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p.66
"자기 자신에게 가하는 폭력의 또 다른 형태는 자기비하이다. 이것도 종종 겸손으로 오해된다. 하지만 겸손은 자신의 고유한 진리에 이르는 용기를 뜻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깊은 내면으로, 자신의 어둠으로 내려가 그 어두운 면과 화해하는 용기를 뜻한다. 그러나 자기폭력에서는 자기 비하를 겸손으로 여긴다."

p.69 ~ p.70
"희생양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다. 항상 모든 것을 떠맡는 사람, 항상 다른 사람의 모든 문제를 짊어지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아주 가혹하게 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공격성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과 함께 갈등을 바라보고 해결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여긴다. 희생양을 상대로 싸울 수는 없다. 그렇게 싸울 경우 불쾌감을 느끼고, 죄책감을 갖게 된다. 희생양은 우리 안에서 그러한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사하는 이러한 힘을 통해 희생양의 근본적인 공격성이 표현된다."

p.69
"희생양의 태도도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하나의 형태이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희생양이시다. 어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희생양으로 생각하면, 그런 생각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도 담겨 있을 경우가 많다."

p.71
"우울증은 보통 자기 공격의 표현이다. 하지만 우울증 안에는 외부로 향하는 공격도 어느 정도 숨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느낌을 억압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p.77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은 자신도 잔인하게 대한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을 때릴 경우 항상 내 안의 무언가도 부수고, 이로써 자신에 대한 존중심도 파괴하는 것이다. 만일 내가 사물을 난폭하게 대하면 나자신에게도 똑같이 난폭하게 대한다. 느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 및 사물과의 관계성을 상실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느끼지 못하고, 사물과도 관계를 맺지 못한다."

p.78
"자기 상관을 욕하려고 흥분 상태에 있는 사람이 욕을 한 후에 더욱 공격적이 되었다. 욕하는 행위는 분명 분노를 가열하는 것이며, 그 결과 사람은 점점 분노에 깊이 빠져든다. 자전거 타기처럼 공격성을 육체적으로 풀어 진정시키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축구, 권투 등의 공인된 공격 행위는 공격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성을 더욱더 가열한다."

p.79
"아이는 자기 부모가 좌절을 잘 대하는 모습, 말하자면 삶에서 늘 거듭 실망했다는 이유로 나약한 아이에게 벌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해야 한다."

p.79
"공격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 처벌로 공격성을 막을 수는 없다.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행도을 없애는 데에는, 긍정적인 행동을 긍정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부정적인 행동을 부정적으로 인정하는 것보다 더 적합하다. 처벌 자체가 폭력 행위에서 기인하면, 폭력 성향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p.90
"예수님은 먼저 우리가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신뢰하면 죄를 좀 더 잘 대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모두 올바르게 잘 살기를 원하지만 잘못 역시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91 ~ p.92
"과거에는 예수님의 많은 말씀이, 사람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자신을 아주 가혹하게 대하도록 자극하는 데 남용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생명의 말씀이다. 곧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는 말씀이며, 자기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고 자신을 등한시하는 삶에 대해 경고하는 말씀이다."

p.94
"예수님의 의도에 따르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삶을 어렵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오히려 삶에 속한다. 나를 방해하는 것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만일 이상만을 고집하며 산다면, 삶은 경직된다."

p.120
"자기 자신을 잘 대한다는 것은 나를 방해하는 것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어둠과 화해하고 나의 내적 모순을 긍정할 각오가 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p.131 ~ p.132
"고행의 본래 의미는, 참된 인간이 되는 훈련을 뜻하며 성공적인 삶에 필요한 숙련에 다다르는 것을 뜻한다. 신비가들은 고행을 하느님 체험을 익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은 일정한 수련을 통해 하느님을 체험하기 위한 내적 자세와 개방성을 갖는다. 하느님 체험은 강요될 수 없다. 고행은,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당신을 드러내실 때 당신을 체험하도록 사람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고행은 인간에 대한 긍정적 이해에서 출발한다."

p.132 ~ p.133
"자기 자신을 잘 대한다는 것이 나의 모든 욕구를 실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내 소망과 욕구에 완전히 얽매일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욕구를 즉시, 반드시 채워야 하는 사람은 성숙할 수 없다. 그는 강한 자아를 발전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욕구와 기분에 넘겨진 상태인 것이다."

p.133 ~ p.134
"내가 모든 욕구에 응하게 되면, 내 안에서는 나에 관한 실망과 분노가 자란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을 아프게 한다. 이러한 일이 오랫동안 지속되면, 나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에 관하여 비참한 생각을 갖는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는 성향이 커진다. 자신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자신을 공격할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공격적으로 대하게 된다."

p.134
"규율을 지키지 않으면 삶은 성장할 수 없다."

p.138 ~ p.139
"자기 자신과 화해한다는 것은 과거의 상처와 화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화해를 피하는 사람은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계속 전달하거나 항상 반복하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화해는 종종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특히 이러한 화해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모욕과, 모욕에서 생긴 아픔을 실제로 인정하고 그것을 한 번 더 겪은 뒤에 그것과 헤어질 경우일 뿐이다. 우리가 상처를 억누를 경우 화해할 수 없다. 우리는 상처와 친숙해져야 하고, 상처에 '입을 맞추어야‘ 하고, 상처를 잘 대해야 한다. 이럴 경우 상처는 새로운 삶의 원천으로 변화될 수 있다."

p.140 ~ p.141
"경건한 사람은 양심의 가책을 달래기 위해 종교적 수련과 업적을 자신에게 더 많이 부과함으로써 자신을 학대한다. 아니면 윤리적으로 가장 훌륭한 상태가 되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자신에게서 몰아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모든 유혹을 첫 단계에서 물리칠 수 있는 전략을 세운다. 그래서 경건함은 종종 유일한 폭정이 되고, 사람을 마음껏 조종하는 억압의 도구가 된다."

p.141
"경건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태도이다. 하느님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외적 형태도 필요하다. 기도, 전례, 의식, 고요한 시간, 묵상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기도와 묵상 등을 실행하되, 최상이나 최고로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유익한 정도로 실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p.145
"내가 기도하는 까닭은, 내 안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느끼고 그 갈망과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이유는 내 삶을 그분께 맞추고 싶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나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p.147
"오늘날 우리는 계명의 첫 부분을 등한시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위험에 처해 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서는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자기 사랑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다. 이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이 건강한 삶에 속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전적으로 희생하는 그리스도인 이 분명히 있다. 그에게는 자기 자신을 더 잘 대하고 자신의 안녕도 돌보라고 권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지나치게 자신의 평안을 위한 나머지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잘 대하라는 우리의 표어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p.148
"삶이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속한다. 자기 자신만을 맴도는 사람의 삶은 정체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펼칠 수 있는 목표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어떤 일에 참여하는 것, 말하자면 다른 사람을 돕고 사랑하기 위해서 한번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릴만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p.149
"도움을 베풀 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할 수 있고, 자신을 위해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원하는 자신의 느낌을 존중할 수 없다는 두려움이 우리 안에 있다."

p.149
"우리가 한결같이 최상의 이상을 반드시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이웃 사랑에는 이기적인 동기도 담겨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기주의가 이웃 사랑을 변질시키지 않을 것이다. 현대 자아실현에서 엿보이는 이기주의의 함정은 종종 순수한 이웃 사랑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릇된 동기가 이웃 사랑을 배후에서 조종할 수 있다는 순수한 두려움 때문에 이웃 사랑을 오히려 포기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부족한 모습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로써 삶은 생기를 잃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실제로 도울 수 있을 때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스스로 빼앗기 때문이다."

p.150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돕기 위해 나 자신과 나의 소망들을 진정으로 내려놓으면, 나는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

p.152
"스트레스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대하지 않는 것을 나타낸다. 스트레스는 세 가지 원인에서 생긴다. 첫째는 일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일을 하든가 주어진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둘째는 내적 태도 때문 이다.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증명해야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훌륭하게 돋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경우, 자기 자신 안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일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다. 셋째 원인은 개인이 일에 관하여 지니고 있는 내적인 반항심일 수 있다. 자신은 본래 다른 일을 위해 태어났다든지, 더 나은 동료들을 만났어야 했다든지, 노동은 원래 의미가 없고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런 사람은 내적인 거부와 더불어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늘 자신이 지쳐 있다고 느낀다. 자신의 스트레스에 대해 한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 나는 내 스트레스의 원인을 찾아야 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마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p.158
"사물에 대한 난폭함은 그 당사자에게 되돌아온다. 가혹하게 대하는 것은 그 사람이 사물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표시이다. 사물을 조심스럽게 잘 다루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잘 대하는 것이다."

p.158
"사물을 대하는 태도는 한 인간의 내적 태도를 알아보는 기준이 된다. 그 태도에서 그의 영혼이 표현되기 때문이다. 거꾸로 우리는 사물을 신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내적 신중함을 익힐 수 있다."

p.159
"접시를 다룰 때 드러나는 난폭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른 영역으로 전해진다. 동료 수사의 느낌이나 자기 자신의 느낌도 난폭하게 대하게 되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런 모든 일을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며, 중요한 것은 단지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이라고 여긴다. 자기 자신을 조심스럽게 대할 수 있기 위해 사물을 신중하게 다루는 법을 익히는 것은 유익하다."

p.164
"나는 내 잘못 때문에 늘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내 잘못에 주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잘못을 반드시 바라보고, 인정하고, 처리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는 그 잘못을 놓아 버려야 한다.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신다면,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 반복하여 내 잘못을 비난하고 나 자신을 모욕함으로써 내 삶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p.166
"예수님은 희생 제물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의무의 제단에 우리 자신을 바치거나 하느님의 마음 에 들기 위하여 우리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 신다. 그리고 사람들의 만족을 얻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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