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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12 (14)
깊이에의 강요
송년 미사를 마치고 들어와 잠깐 한해를 돌아보다가 이 사진을 본다. 하루 종일 성탄 준비하느라 성당에서 동동거리다가 저녁기도 시간에 맞춰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 잠깐 찍은 사진이다. 보나마나 성야나 대축일 당일엔 막상 초 깎고 제의실 치우느라 구유 앞에 고요히 머물 시간이 없을테니 피곤한 몸도 좀 쉴겸 미리 예수님을 좀 보자 싶었다. 아무도 없는 성당. 퇴근하면서 켜두는 십자가 등을 미처 끄지 않고 구유의 반짝이를 켠 후 별생각 없이 앉아 있었다. 한동안 구유의 아기를 바라보다가 문득 십자가 예수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순결하고 가난한 아기로 태어난 자신을 내려다 보는 것처럼, 막 태어난 아기 예수가 세상에서의 삶을 온전히 완수한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올려다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의 시작들을 생각..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1,4-5) #daiyreading 큰 축일을 지내고 나면 마음은 접어둬도 몸은 일단 녹초가 된다. 화려한 장식과 다소 요란한 음악, 들뜬 사람들 무리를 뚫고 출퇴근을 하다가, 모처럼 잠잠해진 평일 저녁 일부러 퇴근길을 좀 둘러서 느긋하게 했다. 성탄이 끝나야 내게도 성탄이 온다. 화려하게 장식된 길을 걸어야 성탄이 되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있어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이 길을 걸어보기 전까진 내게 없는 길과 마찬가지였던 것처럼 빛 역시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깨닫지 못한 ..
황선우 인터뷰집. 이봄. 제목이 “이거다!” 싶었던 책. 에이드리언 리치의 를 읽다가 이 책을 읽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대단한 글은 아니지만, 책을 읽고난 후엔 늘 올리던 소소한 리뷰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황선우 작가의 인터뷰집(좋아하는 마음의 힘을 믿는 9명의 이야기라니!!!)인데 여성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를 말하긴 하지만 어떤 직업인지,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말하기보다 어떻게 살아왔고 여성으로서 어떤 영향을 주고 또 받았는지(얼마나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냐)를 들려준다. 세상엔 힘을 타인에게 행사하기 위해 힘을 축적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힘을 타인에게 북돋우기 위해 힘을 키우는 사람도 있다. 이 책은 당연히 후자에 해당하고, 나의 ‘무언가’를 북돋았고, 나 역시 그러기 위해 힘을 키우며 살고 있다..
안젤름 그륀 지음. 허규 옮김. 성서와함께. 수련소 시절에 신부님 책을 많이 읽고 접해서 그런지, 여러 권을 읽고 나면 책이 좀 비슷하게 읽혀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그륀 신부님 책을 읽지 않았다. 이곳에 다시 온 김에 바오로딸 서점에 들렀다가 오랜 만에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얼른 데려와 저녁기도 전 독서 시간 동안 잘 읽었다. 본디 남의 묵상이나 성경에 대한 개인적 해석은 내 삶에 굳이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토마스 뢰머의 을 읽고 난 후라 그런지 처음엔 많이 당황스러워서 ‘서문’ 정도만 사람들이 읽으면 좋겠다 싶었다. 내게도 서문이 딱 좋다 싶었고. 하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긋고 싶은 밑줄은 점점 늘어났고, 말씀에 대한 해석보다는 그륀 신부님의 말씀 자체가 좋았다. 송봉모 신부님과 느..
맥 바넷 글. 카슨 엘리스 그림. 김지은 옮김. “사랑이 뭔데요?” 짧은 질문에서 시작된 긴 여정. 사랑이 뭔가 궁금해지고 묻고 싶어지는 그 순간이 이미,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순간이 아닐까. 제목으로 사랑을 세 번 반복해야 할 때가 있듯, 사랑을 알아차리기 위해 떠났다 돌아와야 할 때도 있겠지.
보고 믿었다. (요한 20,8) 누가 주님을 꺼내 갔다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말에 무작정 예수님을 보려고 달려간 베드로와 요한의 믿음. 그들이 본 것은 덩그러니 개켜 놓여진 아마포와 수건, 빈무덤이었지만, 그들은 그 빈무덤을 보고서 믿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수 없었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믿었다. 그러니 볼 수 없고 확인할 수 없으니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다. 믿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믿음을 더 단단하게도 하고 반대로 어둡게도 할 수 있다. 보여지는(그분이 보여주시는) 것이라면 빈무덤을 보고서도 부활하신 분의 존재를 믿을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증거만을 찾는다면 우린 아주 오래도록 헤매야 할지도 모른다.
내 계획만 생각해서 길을 나서고, 내 짐작만 믿어서 보이지 않아도 찾지 않고, 내 애쓴 수고만 생각해서 찾은 안도감보다 속상함이 먼저고… 예수가 내 옆에 없다고,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고 원망했던 순간을 되돌아 보면 내멋대로 계획하고 내 짐작만 믿고 내 노력만 가상해서, 내가 예수를 두고 떠났다는 건 까맣게 잊었음을 알게 되더라. 살면서 잊어버린 것, 잃어버린 것들 모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45절) ‘성전’(46절)에서 찾아낼 수 있길 다짐하며 또 한 해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