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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2 (17)
깊이에의 강요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마르 7,28) 포기하지 않고 기도할 것. 이방인이라는 외적 제약에도, 자존심이라는 내적 제약에도 굴하지 말고 기도할 것. 나를 위해서도 남을 위해서도 기도할 것. 내 묵상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내가 나에게 당부하는 이 말이 예수님 말씀 같구나. 생각을 정리하기 힘든 시간이 시작된 것 같다. 문장 한 줄 완성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글로 쓴다고 해서 묵상에 충실한 것은 아니니, 이런 시간엔 말로 다 못할 기도를 그저 마음에 품은 채로 그분 앞에 머물자. 말하기 힘든 시간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허수경 시집. 문학과지성사. 시인은 예언처럼 시를 쓰고 그렇게 성큼 걸음으로 먼 집으로 떠났네. 무심하게 건너가버린 시절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절 - - p.11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의 사랑」 p.53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 중 -
더글라스 케네디 글. 조안 스파르 그림. 조동섭 옮김. 밝은세상. 원제는 Aurore’s amazing adventures. 자폐를 가진 작가의 아이가 오로르가 되었다. 오로르가 탄생한 동기, 작가가 오로르를 보는 시선, 오로르가 세상을 보는 시선도 모두 좋았다. 마음을 읽는 아이 오로르. 과연 오로르가 마음을 읽을 줄 알았기에 이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까? 오로르가 상대의 눈을 보고 마음을 읽어내긴 했지만, 언제나 좋았던 건 아니었다. 아무도 모르길 바라는 아픈 마음도 있고, 아직은 혼자만 알고 싶은 생각도 있고, 자신조차 모르는 진심도 있다. 다만, 오로르가 마음을 읽을 때가 아니라 오로르가 마음을 ‘알아줄 때’, 변화는 시작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오로르 같은 아이가 있을 수도 없고 내가 오로르..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마르 6,54-55) #dailyreading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은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갔다. 가만히 있으면서 기도만 하지는 않았다.
홍은전 지음. 봄날의책. 지도를 보는 것 같았다. 누구는 찾아서 도달하기 위해 지도를 볼 테고, 누구는 여기가 어디쯤인가 싶어, 어떤 이는 발 닿을 기회가 되면 찾아가 보려고... 그렇다면 나는 왜 이 책을 보았나. 책을 읽는 동안 화를 낼 수 있다는 사실마저 '가진 자'의 권력이라는 생각을 하고 또 했다. 불공정한 무언가에 대해서, 희생 당한 이들에 대해서, 일부 정치인에 대해서, 인권을 유린한 기업에 대해서, 쉽사리 분노를 표출하고 야단치듯 글을 쓰거나 하찮은 대상(이런 것이 있단 말인가!)을 다루듯 얕보거나, 대접해주는 듯 존대를 하거나... 하지만 자녀들의 학교를 짓기 위해서 그저 그 동네에 사는 것 뿐인 사람들에게 무릎을 꿇었던 부모들은 화를 낼 수조차 없었다. 그 모든 사건들을 알고 있다는 이..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마르 6,33) 오늘은 배를 타고 떠나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육로로 함께 달려가는 장면에 머물렀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달려갔던 사람들. 눈 앞에서 떠나갔다고 해서 그분 은총이 멈추랴. 내가 그분이 가실 그곳으로 먼저 달려가는 것도 기도요 은총일 것인데. 내게서 떠나갔다고 생각될 때라도, 내 눈에 그렇게 보였을지라도 돌아서지 않을 것.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 그때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34절)하신다. 늘 그분이 내게 먼저 오시..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마르 6,20) 요즘 홍은전의 을 읽어서인지 오늘은 헤로데의 생일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직접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주위에 분명 함께 있었던 사람들. 헤로데의 생일 잔칫날 헤로데 곁에서 먹고 마실 수 있었던 고관들이었고 무관들이었고 갈릴래아의 유지들이었던 그들은 나름의 명예와 권위를 지녔을 테지만, 의롭고 거룩한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지닌 이들은 아니었다. 버젓이 살해가 종용되는 자리에서 그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한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님들 앞이라 망설이며 괴로워하던 헤로데에게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지도 않음으로써 그의..
둘씩 짝지어...(마르 6,7) 언젠가부터 복음의 한 문장도 벅차고 넘치는지, 묵상을 시작하면 한 구절이나 한 단어에 붙들린다. 마음의 여유가 좀 없나 싶지만 이 하나의 구절을 붙드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은 ‘둘씩 짝지어’라는 구절이다. 둘씩, 짝지어... 같이 가되 각자의 성실로만 채울 수는 없는 일. 각자의 길을 걷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도 되는 삶이 아니라 함께 걸어가야 하는 삶. 나의 부족을 네가 채워야 하고(네가 하고픈 일이 아니라), 네게 필요한 것이 나의 우선이 될 때도 있는 삶. 그렇기에 우리의 차이는 도전이 되기도 하고 공백이 되기도 한다. 내가 편한 곳이 아니라 함께 머물 수 있는 곳에 머물고, 지팡이를 쥐지 않은 나머지 손은 너를 의지하거나 너를 부축하는 손이 될 때가 많을 것이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