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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1/02 (17)
깊이에의 강요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예물을 바치려는 사람은 그에 맞갖는 자세를 갖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바치는 예물만 흠 없을 일이 아니라, 내가 흠 없는 예물과 어울릴 것. 기도의 시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훌륭한 기도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기도를 바치는 이의 자세를 먼저 갖추는 것. 예물을 바치는 일도, 기도를 바치는 일도 결국 나 자신을 봉헌하는 일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이 듣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내키지 않은 상태로(실은 도망치다가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고,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악한 길에서 돌아섰다. 회개할 만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회개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뿐. 이처럼 표징이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표징을 믿지 않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요즘 세상도 예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지 않는 게 문제이듯. 눈맑은 스승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경할 만한 영성가가 드물다고, 귀감이 될 선배 수도자가 더 많아야 한다고 불평하고 한탄했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나..
권석천 지음. 어크로스. 사람에 대한 예의... 신앙의 위기든 세상의 위기든 지금이라도 되돌리지 않으면, 어떻게라도 멈춰서지 않으면 추락의 속도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자꾸만 나를 다그치는데 막상 내 그릇을 들여다보면 부끄럽기 그지없다. 믿음에도, 세상에도, 인간 관계에도 명민하게 깨어 있되 지나치게 예민하지도 않은 사람이고 싶지만 가야할 방향을 생각하면 자꾸만 마음이 성급해지고 오히려 실수를 한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읽으며 적어도 이만큼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갈림길에서 길을 알려주는 표지판은 길 위에 서 있을 수 없다. 길 아닌 곳에 서 있을 각오 정도는 해야 길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조금만 더 고단한 삶을 살아야겠다. p.14 "착한 갑질과 나쁜 갑질은 어떻게 구분될 ..
+ 십자가의 길 내가 나를 업고 가는 길입니다 내가 나를 참아주며 걸어가는 길입니다 끊임없이 내가 나를 실망시킬 때에 나에게는 내가 가장 큰 절망이 될 때에 내가 나를 사랑함이 미워하는 것보다 어려울 때에 괜찮다 토닥이며 가는 길입니다 위로하며 화해하며 가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밖에 서 있지 않고 십자가는 바로 내 안에 있다는 것을 휘청이며 넘어지며 깨닫는 그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내가 나를 만나는 길입니다 (홍수희·시인)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12-13) 오늘은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자 한다. 예수님을 광야로 보낸 분은 다름 아닌 성령, 즉 예수님의 광야는 하느님의 뜻이었다. 살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시련을 맞이하곤 한다. 선의로 시작한 일이 오해를 받고, 이름도 소리도 없이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의심을 사기도 한다. 댓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가 있는 그대로 보여지지 않는 순간, 우리는 이미 광야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내보내심, 즉 하느님의 뜻이다. 사순절을 시작하자마자 마치 예비되었던 것처럼 내게 광야가 펼쳐졌..
리처드 로어 지음. 이현주 옮김. 국민북스. 솔직히 말하자면 번역 어투 때문에 몇번이나 고개를 갸웃했다. 이 책이 정말 이런 문체였을까 싶긴 했지만(약간 자기 계발서 같았다...) 내가 알 길이 없으니, 그저 끝까지 읽어보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 적은 구절은 많기도 하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이 '하느님이 없는 교회'에 관한 생각이다. 점점 하느님의 논리가 통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성경에 나오는 좋은 말씀이고, 하느님의 뜻을 찾음이 머쓱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는 슬픈 생각. 좋긴 좋지만 지금은 내 생각대로, 맞긴 맞지만 우선은 이렇게... 내 삶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의 뜻을 기어이 관철시켜야 하는 것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그러다보면 자꾸 입을 다물게 되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40절) 낫게 해 달라고 엎드려 소리치며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대담하게 경계를 넘어서 예수님 앞에까지 다가갔으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낫기를 원하니 제발 낫게 해달라 말하지 않고 이렇게 담담한 어조로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니, 도대체... 이 사람은 왜 자신의 원의를 말하지 않고 예수의 원의를 언급하는가. 오늘따라 이 나병 환자의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기까지 한 (나에게 그렇게 보여지는)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왜 애절하게 매달리지 않나, 왜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나. 사회적 낙인이 찍힌 채로 넘지 말아야 할 경계까지 넘어 그분 앞에 섰으면서도 왜 이렇게 점잖기만 한가. 나병은 감염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마르 12,35-36) 생각이나 말로만 깨어있겠다 다짐하지 말고 허리에 띠를 매어 언제 부름을 듣더라도 즉시 행동으로 응답할 수 있는 상태로 내 몸을 준비시키고, 내 몸 하나만 깨어있지 말고 등불을 켜서 나와 내 주위를 밝혀 예상치 못한 시간에도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나를 둘러싼 환경도 준비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