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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곰곰이 생각하였다.(28절)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복음을 묵상하다가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천사의 말 말고, 성모님의 대답(반응)만 따로 떼어서 읽고 또 읽어봤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이런 태도로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꼭 두렵고 떨리는 중대한 선택이 아니더라도 내키지 않아 한마디 말도 하고 싶지 않다거나 한사코 미루고만 싶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지 아닌지’, ‘지금도 이후도 안전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지’ 염려하다가 그 일이 이루어져야하는 진짜 이유는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7-38) 일꾼은 밭주인의 선택이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선택되었다. 그러니 내 주위의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혼자 푸념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판단할 일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마태 10,1) 열두 제자가 하는 일은 앞부분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9,35)의 반복이다. 일꾼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
“이 광야에서 이렇게 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일 만한 빵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마태 15,33) 오늘은 제자들의 이 질문 앞에서 괜히 마음이 꼬이기 시작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아무리 기적을 체험했다 해도 한 번도 빵이 많아지는 기적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결과를 상상할 수 있단 말인가. 본 적이 있다손 치더라도 매번 기적을 기대할 수가 있단 말이냐. 묻지도 못하는가 말이다... 불평과 딴지가 자꾸만 올라오는 걸 보니, 지금 내가 뭔가에 단단히 걸려 있구나 싶었다. 그래, 서운했다. (난 왜 이리 자주 서운한가...) 지극히 현실적인 이 걱정을, 왜 군중에 대한 연민이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가. 예수님 앞에 우리들 믿음은 다들 고만고만한 것일 텐데, 제자들의 이 말을 단순하게 믿음이 없는 ..
우리 수녀원도 각자 시간되는 때에 만큼은 챙겨보기로 했다. 난 혼자서 봤는데, 희망을 어디에도 둘 수 없는 채로 영화를 본다는 건 정말 너무 힘든 일이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도 있듯, 소용 없을 희망은 품고 바랄수록 고통만 키웠다. 어떻게 하늘도 돕지 않느냐는 생각이 절로 났지만 도와야 하는 건 사실, 하늘이 아니었다. 약함이라고 생각했던 것, 잠시 물러나는 거라고, 지는 싸움이 분명하니 이건 포기가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용기가 조금 부족할 뿐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모이고 모여 거대악이 되었다. 악에겐 이런 것들마저도 보태는 힘이 되었다. 내가 나쁘게 하진 않았다, 죄는 아니지 않나, 어떻게 매번 옳을 수 있냐…는 자위적 합리화는 결국 내가 추구하던 정의마저 무너지게 했고 지금까지, 어쩌면 영원에 가..
존 버거 글. 셀축 데미렐 그림. 신해경 옮김. 열화당. 를 읽고 싶었는데, 어쩌다보니 이 책을 먼저 읽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는 경험마저도 내겐 ‘시간’의 경험 같았다. 내가 뜻한대로 흐르진 않지만 시간은 자신의 순서대로 흐르고, 오고 가는 것들을 맞이하고 보내며 나도 시간 곁에서-온전히 안도 아니고 온잔히 밖도 아닌 곳에서- 시간의 주인이신 분께로 다가간다. p.40 "오래 품은 두려움은 의심이 된다." p.54 "어쨌든 세상에는 시간, 또는 특정한 시간을 거역하는 때들이 있다." p.70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시간이 없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쫓기며, 각자의 삶을 쫓는다."
안젤름 그륀. 김선태 옮김. 성서와함께 몰라서 못하나 싶어서 시큰둥하게 시작했지만 읽어 본(20년 전에 ㅎㅎㅎ) 책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하게 읽고 싶었고, 뒤로 갈수록 이 책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졌다. 모르지도 않았지만 제대로 알았다고도 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 잘 대하기’. 이제 동생 수녀님한테 넘겨줘야지. p.20 "과거에 돌보지 못했던 공격성은 자신을 향한다. 자기처벌은 종종 우울증이나 소화 장애, 두통, 배통(背痛) 등의 정신과 신체상의 증세로 나타난다." p.20 "돌보지 않은 채 방치해 둔 상처는 계속 옮겨가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도록 우리를 강요한다." p.23 "아이를 때리는 엄격한 교육만이 아이에게 공격성을 심어주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쉬기 위하여 아이가 항상 제멋..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루카 19,21) 오늘은 14절(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에 걸려서 묵상이 잘 넘어가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무단히 미워하는 것이 오늘따라 견디기 어려웠던 것. 내가 다 속이 상해서 감정만 끓이다가 좀 가라앉고 나니 곧 애초 그 종의 마음 그릇이 그 정도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을 품삯이 아닌, 주인으로부터 거저 받은 돈을 쥐고서도 ‘거저 주시는 분’의 혜량은 깨닫지 못하는 정도의 그릇 말이다. 열매 맺은 나무가 영글은 열매를 내놓지 않으려..
일란 파페 지음. 유강은 옮김. 열린책들. 출신상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 유대인이라 할 수 있는 일란 파페가 이스라엘과 아랍의 갈등, 이스라엘의 원죄 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이스라엘의 건국 전후로 벌어진 팔레스타인인들에 대한 학살과 추방에 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쓴 책들 중 하나. 나치 폭압으로 뼈아픈 시련을 겪은 유대인들이 저지른 '종족 청소'에 대한 유대인의 고백이자 고발이다. 역사적 전체의 흐름보다는 1948년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탄생과 종족청소의 참혹한 현실을 조목조목 알려준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너무 안타깝다)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2.28기념 도서관까지 가서 빌렸는데 읽는 것이 솔직히 쉽지 않았다. 500페이지가 넘는 책인데 내내 장소와 날짜, 숫자만 바뀌고 파괴, 유린, 학살, 강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