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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최진영. 한겨레출판. 몇 겁을 살아온 듯 아이는 단단했다. 겉으론 아이가 부서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럴수록 부서지는 것은 우리요, 우리의 세상. 작가의, 아이의 솔직함이 무시무시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진짜였는데 가짜로 사는 이들이 부르지 못해서 계속 가짜로 산다.
최은영. 문학동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던가. 선산을 지탱하는 굽은 나무들의 이야기였다. 그 모든 것을 온 몸에 아로새긴 탓에 부서지고 휘었지만 끝까지 지켜내는 이야기. 그리고 그 휜 나무들의 말. 결국 세상을 지켜내는 말. 결국 세상을 살려내는 태도.p.24 ""앞서 얘기한 학생의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죠. 그것도 말을 끊어가면서."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웃음기가 걷힌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28 "그녀가 지적할 수 없는 부분에서 은근하게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상대는 이런 지식을 알지 못하리라고 확신하듯 '~거든요'라는 종결어미를 즐겨 썼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p.31 ~ p.32 "그녀는 어떤 사안에 대한 자기 입장이 ..
이지현. 사계절. 사람들은 볼 수 없지만, 나는 있어요.제목을 읽었음에도 그림책을 넘기며 목화꽃 정원에 사는 사랑스러운 요정들의 이야기인가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그림책이었다. 하지만 클로즈업된 아이들의 우음기 하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상처투성이 손가락들. 상처에 감긴 붕대와 붕대만큼 낡아가는 아이들의 삶. 날개는 부서지고 떨어지고, 아이들은 점점 줄어들다가 어느새 없다. 분명 없지 않은데 보이지 않으니, 볼 마음이 없으니, 아이들은 없다. 있지만 … 환경을 지키는 노력을 하며 편리하고 값싼 플라스틱 제품들을 멀리하고 면 제품을 골랐다. 하지만 이 수요가 급증하는 질 좋은 면을 빨리, 많이 공급하기 위해 목화를 다치지 않고 딸 수 있는 작고 고운 손을 가진 아이들이, 다쳐가며 웃음을 잃어가며 값싸고 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복음을 묵상하다가 나병 환자의 조용한, 담담하다 못해 평온하기까지 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낫게 해 달라고 엎드려 소리치며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넘을 수 없었던 경계를 넘어서(율법에서 나병 들린 사람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고 규정했기에 나병환자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오지 않도록 “부정하다 부정하다”하고 소리를 질러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어야 했습니다.) 대담하게 예수님 앞에까지 나아갔으면서도 왜 자신의 원의(저는 정말 낫고 싶습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원의(스승님께서 하고자 하시면)인 양 말하는가. 무릎은 꿇긴 했지만 왜 애절하게 매달리거나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나. 왜 이렇게 점잖기만 한가. 나병은 감염된 후 피부 괴사가 일어나..
박서련 장편소설. 한겨레출판.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인 노동운동가 강주룡에 대한 이야기. 체공이란 단어를 반가워하게 된 건 배구를 좋아하면서부터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를 두고 어떤 해설위원이 신장도 좋은데 체공력까지 좋아서 공중에 오래 머물면서 블로킹을 잡아내는 선수라고 했기 때문이다. 타임 아웃에서 '체공력 좋은 희진이 앞에서 때리면 어떡하냐'는 상대편 감독의 불만 가득한 지시?를 듣고 나서도 이 단어가 좋았다. 그런데 이 단어를 여기서 다시 만났다. ‘공중에(滯) 머물러(空) 있는 여성(女)' 강주룡. 이젠 마냥 반갑기만 한 단어는 아니게 되었지만 늦기 전에 이 책을 만나, 나도 좀 더 버틸 힘을 내어 보자는 결심을 또 한 번 했으니 책에도, 박서련 작가에게도, 을밀대 지붕 위에 ..
이번 주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장면입니다. 그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은 이 더러운 영이 외친 말을 좀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회당 안, 어쩌면 우리 안에도 '나와는 상관없다'라고 외치는 영이 분명 있습니다. ‘좋은 말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중요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잘못된 걸 알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필요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안타깝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맞는 말이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믿긴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다... 성당에 다니고 열심히 활동도 하긴 하는데 내가 불편해지는 것은 조금도 양보하지 못해서 내 안에..
오늘은 마르코 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첫 번째 제자들의 부르심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시몬(베드로)과 안드레아를 보시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부르심에 제자들은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네,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형제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어떤 이들은 호수에 어망을 던지고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아버지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복음만으로는 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았다거나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다는 정보는 얻을 수 없습니다. 그저 살아가고 있었을 뿐이었던 그들을 예수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은 곧바로 어망을 쥔 손을 빈 손으로, 그물을 손질하던 시간을 빈 시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제 다른 ..
하미나 지음. 동아시아. 이해받지 못했던 여성 우울증에 관한, 작가의 개인 체험과 자신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용기 있는 이들의 인터뷰로 엮어진 책. 말할 용기를 북돋고, 스스로 용기를 내고, 들어주고, 들려주는 이 다정하고 절박한 행위가 얼마나 우리들을 살게 하는지... 때론 이들이 겪은 우울에 공감하기도 하고, 돌보는 사람의 입장이 되기도 하면서 많이 아파하며 읽었다. 나 역시 설명할 길이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던 그 짙은 어둠의 시간을 겪었었기 때문이다. 그저 잠시라도 멈춰지기만을 바라며 숨만 겨우 쉬던 때, 내가 시작한 적도 없는 그 시간을 내가 마칠 수도 없었던 , 내 인생에 내가 없던 절멸의 시간을 통과한 것은 끝까지 내 곁을 지켜낸 이들 덕분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이런 저런 생각 끝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