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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김소윤 장편소설. 은행나무. 그동안 꼭 한번 봉헌된 정난주 성당을 보고 싶었는데 이번 성지순례 때 다녀왔다. 그곳 신부님으로부터 이 책을 받았고, 가슴에 품은 채 대정성지를 방문해 그 묘 앞에서 기도를 바쳤다. 다리를 또 다쳤다. 무척 좋았던 성지순례지만, 밤 열시가 넘어 도착해서 고단한 몸으로 잠마저 부족한 채로 새벽미사를 나가다가 계단을 헛디뎠다. 아찔한 두려움은 잠시, 아, 통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도대체 몇 번째 골절인지. 며칠 동안 도저히 끝이 안 난다는 생각에 머리도 마음도 너무 복잡했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책을 집었지만 집중이 잘 안돼서 짧게 끊어가며 정난주 마리아의 삶을 따라갔다. 읽을 때보다 사이사이 여운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은 시간을 채웠다. 정난주를 끝까지 살게 ..
천선란 소설집. 아작. 틀이 없는 사랑. 혹은 틀을 부수어야만 가능한 사랑. 내가 누군이지를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는 사랑 이야기. 다 좋았지만 은 특히나 더. 너는 남자가 될 거야, 민혁이를 사랑하는 동안
조승리 에세이. 달. 사람에게는 시간이 쌓여 얻어지는 지혜가 있고 아픔이 켜켜이 쌓여 건져지는 현명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나이만으로 어른이 될 수도 없지만, 아팠다 해서 누구나 잘 무르익는 것도 아니라 생각한다. 또한 자신 앞에 자꾸만 놓이는 장애물들을-비록 원치 않는 것이라해도- 하나하나 넘어온 사람들만이 얻게 되는 명석함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조승리 작가의 이 명석함은 시간도 아니고 아픔 만도 아니겠다 싶었다. 살수록 진솔한 사람에게 존경을 품게 된다. 책을 읽으며 작가를 따라 내 마음도 속속들이 들여다 봤다. 그래,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는 거지, 그렇지.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루카 13,21)하느님의 나라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부풀게 한다.겨자씨 자라나 다른 새들이 깃들게 하듯, 혼자만 커지는 게 아니라 남을.혼자 멋지게 부풀어 오르는 누룩이 되는 삶이 아니라, 밀가루 속에 들어가 밀가루와 함께 부풀어 오르는 삶.나는 부풀지 않고 남만 부풀리는 삶이 아니라, 나도 남도 함께 부풀어 오르는 삶.
오스카 와일드 지음. 임종기 옮김. 문예출판사.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용이라 내용보다는 인물들의 변화에 더 중점을 두고 읽었는데그래도 마음에 남은 건,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책임지는 건 역시 자기 자신이라는 것. 얼굴이 변화든 그림이 변하든네가 알아채든 내가 알아채든 혹은 모두가 알아채든서서히 변해가는 얼굴과 표정과 태도는...누가 먼저 알아채느냐는 시간 문제일 뿐, 모두가 다 알게 된다.그리고 그 변화의 책임은 오로지 나의 몫.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에 취해 일그러져가는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는 불행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변하지 않도록 노력하거나 매순간 가꾸어가는 것보다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솔직하게 자신 앞에 서서 직시할 줄 아는 것이 우선이겠지.감출 수 없음을 인정하고 지금부터 받아들이고 내려놓아..
김원영 지음. 문학동네. '입장'(立場)들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 그 입장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그 입장을 헤아릴 줄 알고 그 입장에 다가갈 줄 아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들려주는 이야기마다 숙연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사람이 이토록 투명하고 솔직할 수 있을까.어떻게 살아야 사람이 이토록 겸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어떻게 살아야 사람 마음이 이토록 넓고 깊을까.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예전에는 탁월하게 재미나는 글이나 배울 점이 많은 글에 마음을 뺏겼다면언젠가부터 '빼어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뺏기는 것도 모자라 질투와 경외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다.이 책도 그랬다. 이 작가가 그랬다.p.9"온전한 평등은 추상적 규범이나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능력'의 측면에..
이번 주 복음에는 소경 바르티메오가 나옵니다. 눈먼 거지였던 바르태메오가 나자렛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고, 잠자코 있으라는 사람들의 꾸짖음도 예수님을 원하는 그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의 큰 외침은 결국 예수님께 가 닿았고, 그 목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을 불러 세웠고, 예수님은 그를 당신 앞으로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르티메오는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에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습니다. 신기한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가 헤매지도 않고 예수님께 갔나 봅니다. 복음서는 사람들이 그를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그가 예수님께 가다가 넘어졌다는 이야기도 전하지 않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곧장 예수님께 가서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고, 자신의 믿음이 자신을 구원했다는 예수님..
백수린 에세이. 창비. 작가의 마음 속으로 산책을 다녀온 기분이 드는 책이었다.가녀리고 서툴고 순하고 선한 사람들이 제 보폭으로 세상을 걸어나가길기도하는 심정으로 읽었달까. 하루종일 cpe 교육이 있는 날은그렇게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인데도 마음 한켠은 늘 버거웠다.아침에 좀 더 쉬고 나올 수 있는데도 굳이 서둘러 가방을 싸들고 나와명동성당 근처 벤치나 카페에서 이 책을 홀로 읽으며나도 성곽길 어딘가를 걷는 마음으로오롯한 시간을 보냈다.이 책 덕에 그렇게 나를 채운 후 강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고하루 종일 이어지는 그 시간을 미안함 없이 버틸 수 있었다.그동안 고마웠었다. 리뷰는 아니지만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집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해하지 못하던 아빠의 표정을 보며남성이 보는 세상과 여성이 보는 세상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