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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흐르는 강물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흐르지 않고 멈추는 곳이 있다 살다보면 시간이 멈추는 시절도 있다 김치를 썰면 침이 고이듯, 내가 아닌 남을 위해 묵주를 돌리면 마음에 가만히 아픔이 고인다. 고인 아픔이 파르르 떨리길래 숨까지 참아가며 말없이 기다리면... 그때야 비로소 내 마음이 내 얼굴을 비춘다. 수도자가 '내'가 되는 순간은 내 안에 타인의 아픔을 새기는 순간이다. 살다보면 세상의 시간이 멈추는 때가 있다.
햇수로는 14년째 수도복을 입고 살고 있다. 세월이 얼마건 간에 겉으로나 속으로나 진짜 내가 변한 모습 누구보다 그분이 먼저 아시겠지만... 성인들의 오상과 비길순 없지만 내게는 수도자이기에 생기는 굳은살이 있다. 장궤를 해서 무릎에 생기는 굳은살과 양반다리하고 묵상하기 때문에 복숭아뼈에 생기는 굳은살... 이쁠것 없는 굳은살이지만 하느님 앞에 앉아있었던 시간을 말해주는 것이기에...내겐 소중하다. 남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겠지만 언제나 스타킹 속에서, 신발 속에서 숨어있는 내 굳은살...내눈엔 한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예수님이 나에게 박아주신 견고한 인내의 흔적... 난 수건보다 발이 더 답답했었는데... 사진은 5-6년전 쯤. 친구 신부님은 서원수녀의 사춘기를 지내며 신열을 견디던 나에게 제주도..
오징어를 꺼낼 때마다, 멸치 반찬을 먹을 때마다 덧붙여 지는 말, '우리 성심이 가져온'은 한동안 나를 멋적게 할거 같다. 내 가방에 실려왔고 내가 들고 오긴 했지만, 그것을 준 사람은 분명 피앗수녀이고 그 과정에 나의 의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피앗이 보내준'이라고 수식되는 것이 마땅한 그 오징어와 멸치가 한 번도 어김없이 '우리 성심이 가져온' 오징어와 멸치라고 불리고 있다. 이곳으로 오기 위해 짐을 싸면서 배달해야할 물건들 덕에 마음이 좀 불편했었다. 물론 오징어와 멸치 뿐이 아니라 작은 카드에서부터 교리책, 약, 속옷 등등 제법 부탁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우스개소리로 투덜대며 '성격 좋은 것도 이럴 땐 불편하네. 너무 쉽게 부탁들을 해서...ㅎㅎ' 했지만, 실은 진심이었다. 부탁받은 물건을 ..
청년들 작은 교회 모임에 다녀왔다. 바쁜 시간 쪼개어 성당에 모여 기도를 하고, 읽고 묵상해온 복음을 나누고, 돌아가며 성인들에 대해 공부를 하고… 묵주기도 5단을 서서 그리고 무릎까지 꿇어가며 바치는 젊은이들의 모임을 지켜보며… 이들을 끝까지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발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릴적부터 성당 마당에서 놀며 자랐다. 시간이 많았던 엄마 따라 툭하면 평일 미사에 다녔고, 고3 때도 어른미사 선창을 할 정도였고, 교리교사를 하면서도 빠스카를 하면서도 거의 매일 미사를 드린 적이 많았다. 밤늦게까지 놀고 들어온 다음날 새벽미사까지… 하지만 신앙생활이 길어지고 수녀가 되어 살아가다보니 형식에 매여 살던 신앙생활이 얼마나 좁은 삶이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본디 어느 곳에도 매이..
제의방 창고에서 먼지와 함께 쌓이고 있던 쓰다남은 초, 더이상 촛대를 쓰지 않아 쓰일데가 없어진 초들을 녹여 새 초를 만들었다. 생각보다 예쁘게 만들어져서 흐뭇하구나^^파라핀 녹는 냄새와 버너들이 뿜어내는 열기 덕에 하루 꼬박 두통과 울렁거림에 시달리며 100여 개의 초를 탄생. 녹아야지만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게 반갑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3월 2일 새벽에 대한문 함께살자 농성촌에 불이 났다고 한다. 마흔이 되는 해의 생일선물 치고는 너무 큰 선물이다. 뭐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고 무조건 의심해서 될 일도 아니다만,전기공급이 되지 않는 곳이고, 전기 온열기구도 사용하지 않았고, 침낭과 핫팩으로 추위를 견뎠고, 평소에도 화재가 염려되어 살 에이는 칼바람 부는 날에도 난방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농성촌인데다, 행사 때에만 발전기를 돌렸다고 하니 시간상으로도 방화가 아니고서는 누전, 합선, 혹은 실수로 불이 나기는 어렵다는 게 사실이다. 게다가 나는 의심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자연발화를 내 눈으로 지켜봐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 말이다. 전기를 아껴쓰자는 공익광고를 보면 원자력 발전소 지으려는 핑계가 필요해 쇼를 한다 싶고, TV를 통해 4대강 주위..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와닿는 구절하고는....후후 예수님의 "기다리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그래, 요즘은 내가 엄청 넓은 포도밭에 심어진 무화과나무 같다. 수많은 포도나무에 둘러싸여 주눅이 들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 한 방울 마시는 것도 눈치 보이고,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비슷할텐데, 잘못해서 열매라도 맺었다가는 내가 포도가 아니라는 게 드러날테니 생각만으로도 자꾸만 주눅이 드는 시간. 평범한 나무이면서도 뿌리 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맺는 것보다 다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시간. 내가 왜 여기에 심어졌을까를 고민하는 시간. 그러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시는 예수님이 계신다. 나의 열매를 기다리시는 예수님. 내 열매는 포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