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깊이에의 강요

소중한 것을 다시 꺼내들며 본문

vita contemplativa

소중한 것을 다시 꺼내들며

하나 뿐인 마음 2013. 3. 5. 04:49

청년들 작은 교회 모임에 다녀왔다. 바쁜 시간 쪼개어 성당에 모여 기도를 하고, 읽고 묵상해온 복음을 나누고, 돌아가며 성인들에 대해 공부를 하고… 묵주기도 5단을 서서 그리고 무릎까지 꿇어가며 바치는 젊은이들의 모임을 지켜보며… 이들을 끝까지 응원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기발랄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어릴적부터 성당 마당에서 놀며 자랐다. 시간이 많았던 엄마 따라 툭하면 평일 미사에 다녔고, 고3 때도 어른미사 선창을 할 정도였고, 교리교사를 하면서도 빠스카를 하면서도 거의 매일 미사를 드린 적이 많았다. 밤늦게까지 놀고 들어온 다음날 새벽미사까지…


하지만 신앙생활이 길어지고 수녀가 되어 살아가다보니 형식에 매여 살던 신앙생활이 얼마나 좁은 삶이었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고, 본디 어느 곳에도 매이기 싫어하고 강요받기 싫어하는 성격인 나로서는 서둘러 '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바리사이처럼 규율에 사로잡혀 나를 옭죄고 남도 옭죄며 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다보니… 어느새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 방만한 영혼이 되어가고 있다고나 할까. 무릎 꿇고 흐느끼는 기도를 보고 마음아파하기 보다, '별나네…'하질 않나, 전례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오가는 말들을 들으면 '저거 다 지나가는 건데…'하질 않나… 바삐 성당을 오가며 봉사활동에 부단히 열심인 사람들을 보면 '정작 중요한 건 저런 게 아닐지도 몰라…'하질 않나.


솔직히 이곳보다 한국이 '발달'된 것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성물, 책, 전례 형식, 신앙교육등등 아주 많은 면에서 한국 가톨릭의 수준은 높다. 하지만 잃어가는 것이 있다. (묻혀버린 걸까) 아직 뭐라고 섣불리 판단할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두드리는 뭔가가 있다. 





어릴 적, 횡단보도를 건너갈 때는 손을 들고 건너야 했다. 좌우를 살피고 손을 번쩍 들고… 마치 팔을 뻗은 높이만큼 내가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곧게 높게 뻗은 팔이 달려오는 자동차마저도 막아줄 수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튼 그만큼 그 즈음의 어린이들은 그랬다. 그러나 그런 일이 '애들이나 하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는 나이가 된다. 그 나이가 되면 모든 게 유치해 보이고 손을 든다고 해도 자동차가 나를 구해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렇게 자동차에게 손까지 들어서 비굴하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까지 여기게 된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어쨌건 나를 지키는 건 '나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른이 된다. 나이가 들면 저절로 되어지는 어른이 아니라 그간의 생각이 다시 한 번 바뀌고 나서 도달하는 어른의 단계 말이다. 이 어른이 되면 횡단보도 앞에서 치켜드는 팔에는 자식이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부모의 간절한 바램도 들어 있고, 살다보면 내 지은 죄나 선행과 관계없이 그 무엇도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는 순간도 있음을 알기에 믿지 않는 신에게조차 부탁하고 싶은 마음도 들어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행여나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손톱만큼이라도 남을 더 원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비겁한 보험심리 같은 것까지도.  횡단보도 앞에서 우연에 기대듯 은총에 기대듯 손을 들고 싶어도 염치가 없어 더 이상 팔을 뻗을 수도 없는 자기자신을 깨달아가는 어른의 마음. 횡단보도 앞에서 치켜드는 팔에는 내가 모르는, 깨닫지 못한 아주 중요한 의미들이 담겨 있고 그 의미는 비록 지금 그것을 행하고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걸 비로소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떠나온지 오래된 옛집 다락방에 올라가 먼지 켜켜이 쌓인 상자를 열어, 다시 돌아갈 순 없어도 또다시 그리고 영원히 간직할 수는 있는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쌓인 먼지 털어내고, 이제 일기장을 들고 내 일상으로 돌아와야겠다.

'vita contemplativa'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울  (0) 2013.03.13
수도자의 굳은 살  (0) 2013.03.11
녹아야지만 새 초로 태어난다는 것  (2) 2013.03.04
내가 사는 세상  (0) 2013.03.04
멀리서 그를 보내드리며...  (0) 2013.02.24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