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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3/04 (18)
깊이에의 강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루카 24,41-43) #dailyreading 두려워 했고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 제자들 앞에서(위해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신 예수님. 오늘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시는 예수님을 묵상한다. 사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것이 당신께는 불필요한(하지만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태어나신 것도, 가르치신 것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도 모두 그랬다. 나는 종종 ‘꼭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무의미해 보인다는 이유로,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처사라는 이유..
이번 주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19절a)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 두려움은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합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제자들처럼, 우리도 종종 문을 잠가 놓고 삽니다. 닫는 정도가 아니라 잠가 놓고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다가와 문을 여는 노력조차 아무 소용이 없도록 그렇게 문을 꽁꽁 잠글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19절b)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문을 잠갔는데도 들어오셨습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사..
아녜스 도메르그 지음. 리디 사부랭 그림. 장승리 옮김. 난다. 지구는 아주 연약해요. 그래서 난 그 곁에서 잠이 들어요, 내 꿈들을 주려고요. 연약한 지구를 사랑하는 길은 내가 더 강해지는 것도, 지구를 더 강하게 만드는 것도 아닌 그 곁에서 잠들고 내 꿈을 기꺼이 내어 주는 일. 뭔가를 해 주는 게 아니라 함께 있는.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1) #dailyreading 끝까지 사랑하셨다… 나는 어디까지를 끝이라 생각하는가. 예수님의 끝은 ‘없는데’ 나는 자꾸 끝을 생각한다, ‘있는’ 것처럼. 자꾸 끝을 생각한다,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마태 26,25) #dailyreading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15절) 유다는 이미 값을 재어봤고 계산을 끝냈다. 수석 사제들도 알고 자신도 안다. 그래서 딱하다. 나도 종종 딱하게 산다. 유다는 지금 진짜 아닌 것이 아니라 아닌 척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은돈 서른 닢을 받았고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이 꿰뚤렸을 것이고, 속이고 싶은 욕심과 속이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휩싸여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기회를 회심이 아니라 거짓으로 날려 버렸다. 시늉으로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요한 13,36) 이 장면을 묵상하면 종종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마음에 걸렸었다. 목숨까지 내놓겠다 했지만 얼마 못 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배신할 베드로 때문이 아니라 수도 없이 넘어지고 실패하고 제자리로 되돌아가고야 마는 ‘나’ 때문이다. 나는 또 나에게 걸려 넘어졌다. 이 사순절 동안 또 나는 ‘마음 먹고 무너지고’를 반복했다. 조금 허탈한 심정으로 복음을 다시 읽다가, 36절에서 멈췄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베드로의 호언장담도, 세 번..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요한 12,3) 가끔, 나만 엎드린 것 같을 때가 있다. 다들 앉아서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공간에서 나만 바닥에 엎드려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을 해도 서럽고 쓸쓸하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그것이 향유 한 리트라 치의 봉헌이었음을, 단순히 바닥에 엎드린 것이 아니라 그분 발에 향유를 붓고 닦기 위한 자세였음을, 나만 엎드린 것이 아님을(예수님께서도 곧 나를 위해 바닥에 엎드리실 것이요(내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요한 13장), 내가 기꺼이 엎드려 그 일을 했을 때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리라..
“도대체 그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다는 말이오?”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마태 27,23) #dailyreading 호산나를 외치며 환영하던 사람들이 변했다. 예수가 무슨 나쁜 짓을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도, 남의 말을 제대로 들어볼 생각도, 지금 하려는 내 말과 행동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생각도 없다. 그 어떤 말에도 못 박으라는 소리만 지른다. 하지만 저 군중 중에는 분명 하루하루 고달프게 삶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병을 앓고 있거나 아픈 이와 함께 살며 무거운 삶의 무게를 견디는 이들도, 가정에서 일터에서 종교 공동체에서 무시 당하고 억압 당하는 이들도, 단조로운 삶을 버텨가며 사는 이들도, 자신이 보잘 것 없다는 느낌을 떨쳐내며 사는 이들도 있었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