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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0/03 (22)
깊이에의 강요
권여선 소설. 문학동네. 소설을 읽으며 기시감처럼 자꾸만 떠오르는 복음의 한 장면. 예수란 자의 소문을 듣고 한말씀 들어보리라 찾아갔다가, 그 말씀이 하도 놀라와 어리둥절 하던 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마르 1,27)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소설이다. 이 이야기들은 해야할 말이 있음을 알고 단단히 마음 먹은 이의 것이었다. 하지만 작정한 자의 말이 빈틈 없이 쏟아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듯 나지막히, 그러나 조근조근.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엘리 SF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해 나는 그간 얼마나 무지했었나. 우연히 SF에 발을 들여 놓았고, 요즘 빠져나가지를 못하고 있다(아니, 싫은 것이다). 작품 모두 갈 수 있는 데까지 뻗어가 보는 이야기들이었다. 누구나 고민했을 주제들을, 누구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방식으로, 누구도 가보지 못한 데까지... 라고 감히 말하고 싶을 정도로 놀라웠고. 요즘 내가 사는 세상도 한 편의 SF소설 같다.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감염시켰고 무시무시한 증상을 일으키고 죽음에까지 이어지는 이 병의 감염 경로는 사실 너무나 평범하고 간단해서, 사람들 사는 방식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어디, 사는 방식 뿐인가. 함께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도 조금씩 터득하며 서로를 다독..
송봉모 지음. 바오로딸. 송봉모 신부님의 요한복음 산책 시리즈 5권이자, 고별사 2권.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별사를 읽으며, 사랑하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본다. "인간은 초월적 기쁨이 빈약하면 거짓 기쁨을 찾아 나서게 된다." "관계 안에서 친밀함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관심과 무감각을 경계해야 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친밀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이해와 관심, 그리고 섬세한 감각을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웬 신부는 우리 시대에 영적으로 가장 커다란 위험은 예수님과 교회를 분리시키는 일이라 보았다." "그리스도교는 자신의 십자가를 단순히 지고 가라고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지고 가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자기..
싱고(신미나) 지음. 창비교육. 청소년 마음 시툰. 시가 있고 그 시들을 이야기로 엮으며 만화로 표현한 책. 반대로 소설의 장면 장면들을 시로 엮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아이의 세상도 어른의 세상과 그리 다르지 않고, 미운 마음이 들면 몸이 아픈 맑은 해태 같은 존재가 어른에게도 필요하다. 스스로 해태의 역할을 자처할 수 있다면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건지도. "여리고 약한 듯 보이지만 약하지 않아. 자신의 마음을 미움에게 허락하지 않는 것."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6-27) 예언자가 이방인들 찾았고, 야훼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예언자를 찾아갈 힘조차 남지 않은 과부, 아쉬울 것 없는 군대 장수가 치유 받았다. 인간은 종교, 신분 고하, 재물에 따라 수도 없이 경계를 정하지만 하느님께는 경계가 없다. 주님, 제가 살면서 그어 온 수많은 선들을 부단히 지우며 살아가게 하소서.
자식이 없는 자신을 구박하던 프닌나에게 되갚아주거나 남편 엘카나에게 고자질하지 않고 오히려 주님을 찾았다. 흐느껴 울며 오래도록 기도하는 자신을 보고 술에 취했다고 오해한 엘리의 나무람에 노여움으로 응답하지도 않았다. 쓰라린 삶이 억울하기도 했겠지만 신세 한탄을 하기보다 제사를 드리고 서원을 바쳤다. 성전에서 결심한 바를 끝까지 지켰으며 원하던 바를 얻었지만 그 애써 얻은 바를 자신의 마음대로 하지도 않았다. 한나는 사무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마리아의 노래'의 모태나 마찬가지인 '한나의 노래'로도 유명.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시간에 끌려 허덕이는 현대인에 대한 고찰. 난 조급하기 보다는 공허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라 조급함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둘의 원천이 동일하다는 저자의 글을 읽고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책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덧붙일 자격은 내겐 없는 것 같고, 하여튼 숙제처럼 끌어 않고 시간만 보내다가 이렇게 다 읽고 나니,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일이다. 시간 위기는 위기에 봉착한 활동적 삶이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극복될 것이다." "경험의 주체는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거처는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에 있다. 경험은 넓은 시공간을 포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