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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시간의 향기 본문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문학과지성사.
시간에 끌려 허덕이는 현대인에 대한 고찰. 난 조급하기 보다는 공허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은 편이라 조급함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둘의 원천이 동일하다는 저자의 글을 읽고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책에 대해 뭐라고 한 마디 덧붙일 자격은 내겐 없는 것 같고, 하여튼 숙제처럼 끌어 않고 시간만 보내다가 이렇게 다 읽고 나니,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을 뿐이다.
"필요한 것은 사색적 삶을 되살리는 일이다. 시간 위기는 위기에 봉착한 활동적 삶이 다시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순간에 비로소 극복될 것이다."
"경험의 주체는 결코 자기 자신과 동일한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거처는 지나간 것과 앞으로 올 것 사이에 있다. 경험은 넓은 시공간을 포괄한다. 경험은 매우 강렬한 시간적 성격을 지니며, 이 점에서 순간적이고 시간적으로 빈약한 체험과 대비된다."
"공허한 지속이나 휩쓸려가는 시간이나 모두 탈시간의 결과다. 가속화된 행위의 불안은 잠 속에까지 연장된다. 밤이 오면 그러한 불안은 불면의 공허한 지속으로 이어진다."
"충만한 시간의 반대상은 시작도 끝도 없이 공허한 지속으로 늘어진 시간이다. 공허한 지속은 휩쓸려가는 시간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과 이웃하고 있다."
"인간은 불시에 때 이른 끝장을 맞이한다. 죽음이 인생, 삶의 시간 자체에서 도출되는 결말이라면, 폭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종결이 있을 때만 인간은 삶을 스스로 마지막까지 살 수 있고 제때에 죽을 수 있다. "
"조급성과 공허한 지속은 동일한 원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휩쓸려가는 시간, 멈추지 않고 흘러 없어져버리는 시간은 밤을 공허한 지속으로 변모시킨다. 공허한 지속에 내맡겨진 상태에서 잠을 자는 것은 불가능하다. "
"충만한 삶은 그저 양적 논리로 정의되지 않는다. 온갖 삶의 가능성들을 실현한다고 자연히 충만한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건들을 단순히 헤아리고 열거한다고 저절로 이야기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
"문제는 오늘날 삶이 의미 있게 완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삶이 분주하고 초조해진 원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이 시작하고 “삶의 가능성들” 사이에서 불안하게 우왕좌왕한다. "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가속화는 생활세계의 다양한 변화를 촉발하는 원천적 과정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문제의 징후 또는 파생적 과정일 뿐이다. 안정성을 잃어버린 원자화된 시간, 붙들어주는 어떤 중력도 없는 시간이 가져온 결과인 것이다. 시간은 내달려간다. 황급하게 마구 달려간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적 결핍을 만회하기 위해서이지만, 그런 목표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가속화만으로 받침대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속화는 오히려 기존의 존재 결핍의 상태를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킬 따름이다."
"전반적인 탈시간화는 의미를 형성하던 시간적 매듭, 종결, 문턱, 이행 등의 소멸을 가져온다. 시간이 예전보다 빨리 흘러간다는 느낌도 뚜렷한 시간의 분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은 사건이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채, 즉 경험이 되지 못한 채 빠르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버리는 까닭에 더욱더 강화된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받침대 없이는 자유도 없다. "
"충족과 의미는 양적인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긴 것과 느린 것이 없이 빠르게 산 삶, 짧고 즉흥적이고 오래가지 않는 체험들로 이루어진 삶은 “체험 속도”가 아무리 빠르다 한들 그 자체 짧은 삶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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