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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0/04 (8)
깊이에의 강요
존 클라센 글, 그림. 서남희 옮김. 시공주니어. 알듯 말듯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마침내 도달한 곳은 너무 포근하고 찡했다. 천천히, 조용히 걸음을 옮기다가 끝내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겠지. 들키지 않고 싶으면서도 자꾸만 친구에게 물어보는 마음이, 아무런 걱정도 않는 친구의 마음에 반했겠지. 꿈에서조차 ‘함께’ 해주는 친구의 마음. 돌아서서 천천히 친구에게로 돌아가는 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나를 돌아서게 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자꾸 생각났다. "너도 거기에 있어. 꿈속에 있어. 너에게 어울리는 모자도 있어. 우리 둘 다 모자가 있다고?"
봄이 주는 위로는, 지지 않는 꽃이나 떨어지지 않는 잎이 아니라 ‘새로 돋음’이라는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마침표를 찍지 못해 좌절하고 있을 때, 찍지 못한 마침표는 잠시 그대로 두고 새 문장을 시작해도 괜찮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믿음의 담보로 표징을 요구한 군중. 생명을 준다니 덜컥 탐이 나서 그 빵을 늘 달라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 당신께 ‘오라’ 하시고 ‘믿으라’ 하신다. 당신께 가야 배고프지 않고 당신을 믿어야 목마르지 않다고 하신다. 난 배를 채우고자 하는가, 그분께 ‘다가가’ ‘믿으려’ 하는가.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이 구절은 또 얼마나 아픈가.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6,36)
“저희가 모르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뉘우치며 살고자 하오니, 갑자기 죽음을 맞지 않게 하시고, 회개할 시간을 주소서.” (재의 수요일 재의 예식 응송) 마음의 준비도 없이 미사 없는 사순시기를 시작했습니다. 재의 예식도 할 수 없으니 혼자 예식서를 읽으며 묵상하던 중 이 응송의 말씀이 제 마음을 오래도록 붙들었고, 저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순시기를,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성사 없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바이러스가 수많은 사람들을 순식간에 감염시켰습니다. 병증이 가볍게 끝날 수도 있지만, 무시무시한 증상을 일으키고 죽음에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이 병의 감염 경로는 사실 너무나 평범하고 간단해서 당혹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예방 수칙이란 것도 어떻게 보면 참으로 당연하고 간단하고 쉬웠는데 ..
최초의 성서 본문 비평가로 불리는 여예언자 훌다.요시아 임금의 종교개혁 때 주님의 집에서 발견한 책에 관해 문의하고자 힐키야 사제 일행이 찾아간 예언자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두려움 없이 하느님의 진노를 당당히 전했다. 재앙을 전하다가 임금의 진노를 살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훌다는 저주를 번복하지 않았다."요시아처럼 모세의 모든 율법에 따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께 돌아온 임금은, 그 앞에도 없었고 그 뒤에도 다시 나오지 않았다."(2열왕 23,25). 가장 잘 반응하는 마음을 지녔다는 요시아. 이런 요시아 임금이 당대 예언자인 예레미야, 스바니아, 나훔, 하바쿡, 훌다 중 훌다를 선택해서 찾아가게 했다. 주님의 저주에 관한 책을 해석해야 하는 중차대한 시기에 훌다를 찾아가..
최영미 산문집. 해냄. 최영미 시인=선운사 선운사라는 시 때문에, 수련소 시절 소풍 장소를 바득바득 우겨 선운사에 갔던 적도 있다. 동백 철이 아니라 동백은 못봤지만 ‘잊는 건 한참’이라는 구절을 반복하며 선운사 주위를 혼자 걷고 또 걸었었다. 뾰족하게 공들여 깎은 연필로 글을 쓰는 시인 같았다. 읽는 나도 그 연필로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연필심이 닳으면 다시 깎으면 될 일인데, 그땐 뾰족함이 닳을까 조심스러웠다. 몇 년 전 를 읽었고 올해 초에 를 읽었다. 그러면서 조금씩 연필심이 닳고 있었나 보다. 이번 책은 기분 좋은 굵기로 닳은 연필 같았다. 샤프심이 줄 수 없는 부드러운 촉감, 가벼우면서도 가늘지 않다. 그래서 다 읽어버리기 전에, 방바닥에라도 앉아 마저 읽을까 싶었다. 언젠가부터 바닥에 앉는..
수잔 L. 나티엘 지음. 이상훈 옮김. "나는 이 책이 두려움과 외면이 아닌 더 많은 이해와 더 많은 배려와 허용이 있는 곳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낙인은 대낮의 밝은 햇빛 속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어둡고 외로운 곳에 가느다란 빛으로 밝게 비추길 바란다." - 에필로그 중 - 부모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어느 날 갑자기 무방비 상태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상태에 놓인 아이들의 이야기다. 정신질환에 대한 낙인과 편견으로 더 가혹한 삶을 살아가야 했던 이들이 이 말고도 얼마나 더 많았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이 아이들을 지켜줘야 했던 어른들의 부재가 너무 가슴 아팠다. 알아봐 주지 못하고 '네 탓'이 아니라고 알려주지 못해, 나도 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