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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마태오의 우물/마태오 26장 (17)
깊이에의 강요
유다를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던가. 칼과 몽둥이까지 들고 와서 붙잡아야 하는 사람인데도, 유다가 신호를 보내야만 알아 보고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붙잡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세상엔 모르고 짓는 죄도 많고, 알고자 애쓰지 않아서 불의에 자신도 모르게 가담하게 되는 일도 많다. 선은 가만히 앉아 악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다. 유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곧장 예수님께로 직진한다. 그리고 친교의 표지인 인사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에게 넘겼다.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으시고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하시며 이 모든 것을 허용하셨다. “친구야, 네가 하러..
마태오 복음사가는 시간과 공간을 일반적으로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수난을 다루는 26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밝힌다. 겟세마니, 올리브산이라고 명확히 밝힘으로써 이 사건은 1회적이고 유일한 사건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시고 당신은 더 나아가신다. 예수님에 의해 제자들과 3명의 제자, 3명의 제자와 예수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시거나 가까이 오라고 부르지만 이 장면은 예외다. 가까이 부르신 3명의 제자와 예수님 사이의 거리를 묵상한다. 일심동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관계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아무리 가깝고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세상에는 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홀로 ..
마태 26,31-35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31절) 예수님의 몸과 피를 나눠 먹은 제자들이 그날 밤 뿔뿔이 떨어져 나간다. 제자들에게 넘겨진 예수님 역시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상황(제자들의 배신, 수난, 죽음...)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신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31절 참조; 즈카 13,7)는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이 모든 것은 팔아넘긴 유다의 탓도, 죽음을 공모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 탓도, 뿔뿔이 흩어질 나약한 제자들 탓도 아니고 ‘하느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 말씀이 어렵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긴 하지만, 분명 일이 어그러지도록 만든 누군가의 탓이 있다고 말하고 ..
이제 예수님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시며 하느님을 대면하신다. 하느님께 먼저 당신의 몸과 피를, 즉 당신 자신을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내어주셨다. 제자들의 준비와 예수님의 준비는 이렇게 달랐다. 늘 하던 대로 하면 되리라 생각하고 준비했던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라는 파스카 음식을 준비하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제자들처럼 늘 하던대로만 예수님 앞에 나가는 건 아닌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음식만 바치고 나 대신 늘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예수님을 매일 마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예수님은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다.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주셨다. 이렇게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손에 ‘넘겨졌다’. 또한 매일 미사에서 우리..
값이 매겨지고 사고 팔리는 노예처럼 예수님이 넘겨진다. 당신이 돈에 넘겨진다는 유다의 은밀한 계획을 다른 제자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그것도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제자들 중 하나에 의한, 예수님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에 의한, 마음 먹고 본격적으로 당하는 배반이다. 예수님은 왜 누구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18절처럼 지금은 유다이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일까.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저마다 묻기 시작했다. 아무도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제자들. 이것이 되물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인가. 나만 아니면 될 일인가. 왜 상황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만 빠져나가려고 하는가. 제자들은 ..
제자들의 준비와 예수님의 준비. 모두가 각자의 준비를 해야 하고 그 준비가 모아져서 하나의 큰 사건을 이루어간다. 늘 하던 대로 자기들끼리 무교절 음식을 준비한 제자들은 장소만 스승이 원하는 곳으로 하려고 한다. 이 음식은 해방절 음식으로 노예에서 자유인으로 해방될 힘을 주는 음식이다. 스승은 이 음식을 제자들에게 주고 싶으셨다. 그리고 그 음식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이었다. 스승은 도성 안 아무개를 찾아가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고 말하라 하였다.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다. 누구든 이 복음을 읽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을 넣어 보라는 초대인가. 예수님이 직접 내 삶에 들어오셔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놓으시면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신다. 어..
예수님이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 계신다. 스스로 죄인이라 외치며 사람들 앞에서 가슴을 치며 물러나야 했던 나병 환자의 집에 제자들과 함께 찾아가시고 식사도 하신 예수. 어쩌면 이 상황부터 제자들은 조금씩 불편했을 지도 모르겠다. 느닷없이 한 여인이 다가오고, 매우 값진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예수는 놀라지 않으셨고 가만히 계셨다. 제자들은 불쾌함을 표출했다. 여인은 예수님만 봤다. 자신이 쏟아 부은 향유의 값어치를 신경 쓰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남을 가난이나 비난도 개의치 않았다. 오로지 예수님만 봤다. 사람들의 시선에 갇히지 않고 용기 있게 예수님께 나아가 향유를 부은 이 여인처럼 기도하고 싶다. 내게 있는 가장 값진 것을 온전히 드리는 기도를, 내 시간 내 노력 모두가 오로지 예수님을 향하..
여기서부터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하시던 말씀을 모두 마치시고, 제자들을 향해서만 얘기하신다. 세상을 향해 하실 말씀은 다 하신 셈이다. 하지만 성경은 예수님과 제자들만 비추진 않는다. 예수와 제자들이 나오는 장면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나오는 대사제의 저택을 연달아 비추며 장면을 대비시킨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2절) 파스카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넘겨짐’이다. 사람들을 지어 만드신 분이 사람들 손에 넘겨진다는 것.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 죽음에 넘겨진다는 것. 수난의 끝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길을 걷는 심정은 어떨까. 예수님은 수난의 길을 마지 못해 걸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입하시면서(수난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