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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6,36-46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본문
마태오 복음사가는 시간과 공간을 일반적으로 명확히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수난을 다루는 26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밝힌다. 겟세마니, 올리브산이라고 명확히 밝힘으로써 이 사건은 1회적이고 유일한 사건으로 드러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리를 지정해 주시고 당신은 더 나아가신다. 예수님에 의해 제자들과 3명의 제자, 3명의 제자와 예수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먼저 다가가시거나 가까이 오라고 부르지만 이 장면은 예외다. 가까이 부르신 3명의 제자와 예수님 사이의 거리를 묵상한다. 일심동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관계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하는 지점이 있다. 아무리 가깝고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세상에는 그 누구와도 나누어 가질 수 없는, 홀로 겪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 겟세마니에서 예수는 그 시간을 홀로 하느님과 대면했다.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이 물리적 거리는 훗날 좁혀지고 사라진다.
조금 더 가까이 부르신 3명의 제자들을 보자. 그들은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다. 겁없이 죽음도 불사하고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와, 뜻도 모르면서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을 마시겠노라 했던 두 형제이다. 결국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영예의 자리를 탐하던 야고보와 요한이지만, 모두 예수님을 사랑했고 무엇에 이끌렸든 간에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다고 했으며 예수님 고통의 가장 가까운 자리까지 간다. 우리의 기도는 이렇게 말 한마디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하느님께 올린 기도는 점 하나까지도 허투루 낭비되지 않는다.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38절) 예수님은 홀로 기도하셨다. 아마도 아직은 제자들이 그 기도에 온전히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은 근심과 번민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의 기도를 제자들은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깊은 고통의 시간에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심한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런 고통이 내게 생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자. 죽을 것 같은 괴로움을 안고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 땅에 대고 엎드린 그 앞에 하느님은 계신다. 내가 나아갈 그 자리에 이미 하느님은 계신다. 예수님은 이 시간이 온전히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온전히 자신을 내어놓으셨고 이 사건 전체를 하느님이 주도하고 계신다.
“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당신의 심정을 알려주시면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기도’이다. 당신과 함께 기도해 달라. 죽도록 고통스러운 예수님을 지켜보며 기도하는 것, 이것이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고통 중에 있는 이들과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시간의 증언자가 되는 것. 사람과의 일에서도, 현실적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 모든 도움을 우리가, 내가 모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기도하는 일은 누구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첫번째 기도 39절) 첫번째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을 자고 있었다. 제자들이 잠들고 싶어서 자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제자들은 깨어 있고 싶었지만 철저히 무기력한 상태로 잠에 떨어졌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따르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상태를 ‘유혹’이라고 하신다. 이 유혹의 상태는 지금 예수님과 반대되는 상태 즉 ‘깨어서 기도하는 상태’의 반대이다. 예수님 말씀으로 보자면 기도하지 않는 모든 시간이 유혹이다. 마음은 간절하다 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42절 두번째 기도) 이제는 비켜가겠다고 하지 않으신다. 첫번째 기도에서는 내키지 않는 심중을 그나마 비추셨지만 두번째 기도에서는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길 원하다고 말씀하신다. 이 첫번째 기도와 두번째 기도 사이에는 제자들이 있었다. 간절하지만 도저히 버텨낼 수 없는 깊은 유혹의 시간. 예수님의 기도를 더 진전시킨 것은 이 유혹에 빠진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지 못하는 상태,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상태였던 이 제자들을 일으키기 위해 예수님은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셨다. 제자들의 나약함이 예수님을 더 강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제자들은 눈이 무겁게 감겨 자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셔서 한 번 더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제자들은 여전히 눈을 감고 자고 있었고(제자들은 이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 눈이 열린다. 루카 24,31)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워서 일으키셨다. 예수님에겐 이제 두려움이나 주저함이 없다.
오늘은 조금 더 예수님의 등 뒤에서 말없이 머물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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