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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마태 26,47-56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 본문
유다를 따라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랐던가. 칼과 몽둥이까지 들고 와서 붙잡아야 하는 사람인데도, 유다가 신호를 보내야만 알아 보고 붙잡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붙잡아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다. 세상엔 모르고 짓는 죄도 많고, 알고자 애쓰지 않아서 불의에 자신도 모르게 가담하게 되는 일도 많다. 선은 가만히 앉아 악을 멀리하는 게 아니라,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함’으로써 실천할 수 있다.
유다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주저하지 않고 곧장 예수님께로 직진한다. 그리고 친교의 표지인 인사와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칼과 몽둥이를 든 큰 무리에게 넘겼다.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으시고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하시며 이 모든 것을 허용하셨다.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50절)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하셨던 분이 유다를 친구라고 부르셨다.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하시며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5)하신 분이 유다를 여전히, 그리고 마지막으로 ‘친구’라고 부르셨다. ‘친구’라는 말이 이렇게 아픈 말이었던가.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친구라 부르신 이가 바로 유다였다. 이 정답고 사랑 가득한 표현을 유다에게 하신 후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하시며 다시 한 번 수난의 길을 적극적으로 허용하신다. 사람들은 유다의 입맞춤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이 끝나자, 손을 대어 그분을 붙잡았다.
예수님의 ‘넘겨지심’은 또 다른 방식의 ‘다가감’이었다. 당신 몸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당신을 믿는 이들에게 넘겨지시는 방법을 택하신 것도, 당신을 붙잡고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 이들에게 붙잡힘으로써 넘겨지시는 방법을 택하신 것도 모두 ‘다가감’이었다.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행복에 젖어 있을 때, 고통에 울부짖고 있을 때, 죄스러움에 절망할 때... 모든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이런 무도한 방식으로 당신을 다룬다 해도 그분은 이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그러면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54절, “예언자들이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56절)
예수님은 자신의 부당한 체포에 분개한 이가 폭력에 같은 폭력으로 대응하려는 것을 말리신다. 이렇게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하지 않음’에서 더 위엄있게 드러난다. 엘리야는 산을 할퀴고 바위를 부수는 강한 바람 가운데나 지진이나 불 속에서는 오히려 주님을 발견하지 못했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올 때 주님을 만났다(1열왕 19,12).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지 않을 때 그분의 전능하심은 더 크게 드러난다. 침묵이 가장 큰 웅변일 때가 있듯 천사 열두 군단을 보내서라도 멈출 수 있는 분이, 폭력에 폭력으로 응징하지 않으시고 생명을 내놓으신다. 하느님의 전능은 ‘해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
이렇게 주님께서 목자를 쳤으니 양떼는 흩어졌다.(31절 참조)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다. 달아난 제자들을 탓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중에 있을까? 이 무시무시한 상황을 버텨낼 힘이 제자들에겐 없었다. 악이 만드는 죽음과 어둠, 고통의 상황을 제자들은 감당할 수도 없었고 이겨낼 수는 더더욱 없다. 이 장면은 그저 수석 사제들, 원로들과 예수님의 싸움이 아니다. 하느님과 악이 맞섰다. 예수님이 붙잡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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