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렌의 노래
- 박태범 라자로 신부
- 사람은 의외로 멋지다
- 그녀, 가로지르다
- 영화, 그 일상의 향기속으로..
- 사랑이 깊어가는 저녁에
- 어느 가톨릭 수도자의 좌충우돌 세상사는 이야기
- 테씨's Journey Home
- 성서 백주간
- El Peregrino Gregorio
- KEEP CALM AND CARRY ON
- HappyAllyson.Com 해피앨리슨 닷컴
- words can hurt you
- 삶과 신앙 이야기.
- Another Angle
- The Lectionary Comic
- 文과 字의 집
- 피앗방
- 여강여호의 책이 있는 풍경
- 홍's 도서 리뷰 : 도서관을 통째로. : 네이버 블로…
- 행간을 노닐다
- 글쓰는 도넛
- 명작의 재구성
- 사랑과 생명의 인문학
- 자유인의 서재
- 창비주간논평
- forest of book
- 읽Go 듣Go 달린다
- 소설리스트를 위한 댓글
- 파란여우의 뻥 Magazine
- 리드미
- 여우비가 내리는 숲
- 인물과사상 공식블로그
- 개츠비의 독서일기 2.0
- 로쟈의 저공비행 (로쟈 서재)
- 세상에서 가장 먼 길,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 2.…
- YES
- Down to earth angel
- BeGray: Radical, Practical, an…
- newspeppermint
- 켈리의 Listening & Pronunciation …
- Frank's Blog
- 클라라
- Charles Seo | 찰스의 영어연구소 아카이브
- 영어 너 도대체 모니?
- 햇살가득
- 수능영어공부
- 라쿤잉글리시 RaccoonEnglish
- Daily ESL
- 뿌와쨔쨔의 영어이야기
- 교회 음악 알아가기
- 고대그리스어(헬라어)학습
깊이에의 강요
마태 26,20-25 저는 아니겠지요? 본문
값이 매겨지고 사고 팔리는 노예처럼 예수님이 넘겨진다. 당신이 돈에 넘겨진다는 유다의 은밀한 계획을 다른 제자들은 몰랐지만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그것도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제자들 중 하나에 의한, 예수님과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에 의한, 마음 먹고 본격적으로 당하는 배반이다. 예수님은 왜 누구인지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18절처럼 지금은 유다이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일까.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저마다 묻기 시작했다. 아무도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하는 제자들. 이것이 되물어야만 알 수 있는 일인가. 나만 아니면 될 일인가. 왜 상황을 바꾸어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자신만 빠져나가려고 하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팔아넘겨지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여기는가. 이 와중에 왜 그리도 ‘혼자만’이 중요한가. 이 대목을 묵상하는데, 내 안에서는 끝없이 질문이 올라왔고 속상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나의 이 분노는 과연 나 혼자라도 결연하게 배반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일까. 어쩌면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배반하지 않아준다면 나의 배반이 좀 덜 죄송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닌가. 혹은 내 속마음을 들켜서 되려 화를 내는 건 아닌가. 이유가 어떻든 간에 모두가 배반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너는 아니다’는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아니, 할 수 없으셨다. 나 역시 배반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배신에 차이가 있다면, 치밀하고 은밀하게 배반을 계획했던가 아니면 자신의 약함으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졌던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모든 배반을 아시면서도 불러 모으셨고 가르치고 사랑하셨다. 그 가르침과 사랑을 멈추지 않으셨고, 이천 년 전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 대한 가르침과 사랑도 여전히 멈추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우리의 배반은 멈추었는가.
24절을 보자. ‘그자가 팔아넘길 것’이지만 예수님은-사람의 아들은- 떠나간다고 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주도권을 가지고 팔아넘겼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나의 주도권을 가지고 떠나가는 것이다.’는 이 말씀을 제자들은 당장 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배신자와 함께 있으시면서도 담담하게 당신의 일을 하신다. 오히려 그자가 누구인지는 유다가 스스로 드러낸다. 모두가 (몹시 근심했다고 하니 아마도 주눅든 목소리로)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유다 혼자 ‘스승님’이라고 부른다. 혼자만 침묵을 지킬 순 없으니 자신도 다른 제자들처럼 한 마디를 하긴 했는데, 주님이라고 부르진 못했다. 차마 ‘주님’이라고 부르지 못한 건 ‘주님’을 넘긴 것은 아니길 바랐던 걸까. 예수님은 대답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그래, 결국 유다의 말이 유다를 드러내고, 우리의 말은 우리를 드러낸다.
'마태오의 우물 > 마태오 26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태 26,31-35 우리는 모두 정말 진심이었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0) | 2018.10.03 |
---|---|
마태 26,26-30 우리도 예수님을 넘겨받았다. (0) | 2018.10.03 |
마태 26,17-19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0) | 2018.10.03 |
마태 26,6-13 어떤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다가와, 식탁에 앉아 계시는 그분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 (0) | 2018.10.02 |
마태 26,1-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에게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0) | 2018.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