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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록2023/02 (11)
깊이에의 강요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마르 7,15) 나에게서 나오는 것 즉, 품은 생각, 마음 속 판단, 뒤돌아서 하는 뒷담화, 상처 입히는 날카롭고 험한 말, 생각 없이 뱉는 무례한 말이 나를 더럽힌다. 남도 마찬가지다. 그에게서 나오는 말들은 내가 아니라 그를 망칠 뿐이니, 그 말에 걸려 넘어져 나 자신을 망칠 필요도 없다. 내게서 나온 것은 나를, 그에게서 나온 것은 그를… 하지만 참 어려운 일이지.
십자가의 성요한 지음. 최민순 옮김. 바오로딸. 내가 어둔밤을 통과하고 있는 줄 알았기에 더듬어 찾아내듯 이 책을 찾았다. 어둔밤… "하느님께서는 영혼들을 어두운 밤에다 두셔서 이 모든 불완전을 깨끗이 씻기시고 앞으로 이끌려 하시는 것이다."라는 십자가의 성요한의 말에 위로를 얻으려 했다. 하지만 내 고민은 아직도 초심자의 어리석음일 뿐. 이 책을 읽은 지금의 나가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조금은 아프지만, 어쩌면 속시원히 하느님 앞에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둔밤이 아니라 내맘대로 숨어든 어둡고 서늘한 구석일 뿐이었구나 싶지만, 이 한심함과 부끄러움마저도 하느님께 드릴 수 있겠다는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어둔밤마저도 내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마련하신 길에서 그저 당도하게 되는 것이고..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르 6,56) 기도에 대해 말할 때 종종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자녀를 위해 손발이 닳도록 기도하고 헌신 봉사하며 살았다 해도 천국 문은 각자 열어야 한다는 것.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님 가까이에 데려다 놓아도 손을 대야하는 건 병자 본인이다. 내 일처럼 도와주는 사람이 많고 정성 다해 마음 써주는 사람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마음을 바꾸고 행동해야 하는 건 ‘나’이다. 아무리 날 위해 열심히 기도해주는 이가 있어도 나만이 해야하는 일이 있다.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야 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